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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나물 Apr 22. 2020

머릿속을 정리할 때가 왔다

투머치띵커의 브런치 첫 글

  XX년 전, 나는 '낯가리다'라는 단어가 세상에 없는 것처럼 방실방실 잘 웃는 아기였다. 고모든 삼촌이든, 누군가 안아주기만 하면 순둥이 모드를 유지했던 나 때문에(?) 맏며느리였던 엄마는 명절은 물론 각종 제사 때 부엌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작은 엄마가 화장실만 잠깐 가도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사촌동생 1호와 2호를 보며 엄마는 말했다. "사람들은 니가 안 울어서 효녀라고 하지만 사실은 걔네가 효녀고 효자야. 부엌에 있으면 섰다 굽혔다만 반복하는데 안방에 가면 잠깐 등 붙이고 앉을 수라도 있거든." (그 말이 틀린 말이라는 걸 알게된 건 숙모가 자리에 앉기만 하면 목청을 키우는 사촌동생 3호가 태어난 후였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항상 사람에 둘러싸여 있었다. 단체를 만들고, 나름의 행사를 기획하는 일을 좋아했었다. 엄마가 하던 십자수나 비즈공예 재료를 잔뜩 갖고 와서 전 학년에 유행시키기도 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꾸준히 체육대회나 수련회에서 춤을 췄었다. 팀원을 모으고, 곡을 정하고, 춤은 나름대로 만들어냈다. 학년에서 춤 깨나 춘다는 친구의 친구를 초빙해서 춤 동작을 보완했던 열정 넘치는 기억도 있다.

  고등학교 1학년 진로 조사서에 썼던 희망직업은 '외교관'. 외교관이 실제로 하는 일의 성격은 매우 다양하지만, 당시 내가 그리던 외교관은 전 세계 누구에게나 악수를 청하며 그 나라 말로 인사를 주고받는 진정한 글로벌 외향인이었다.


  졸업 후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지방 일반고에서 온 나와 달리 절반이 넘는 우리 과 동기들은 서울 동서남북에 위치한 각 외고 출신이거나 해외고, 국제고 졸업생들이었다. 고등학교 때 이미 AP(Advanced Placement, 대학 수준의 과목을 고등학교 때 미리 수강하는 것)를 따고 온 친구들도 태반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 1학년은 시험을 보고 영어 수업 레벨을 정했는데, 기초/일반/고급/웨이브로 나뉘었다. 영어를 꽤 좋아하고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고급대학영어를 수강할 때 친구들은 웨이브(다른 등급과 동일한 2학점을 받고 수업은 면제되는)를 당연하게 받아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 이전에, 내가 기대했던 나에게 실망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나는 점점 부정적 내향인이 되어갔다.


  저자 직강의 전공 수업들이 너무나도 벅찼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그런 훌륭한 교수님들에게 수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그 내용을 이미 이해한 듯한 동기들을 보는 건 더더욱 힘든 기분이었고, 나는 점점 더 무기력해졌던 것 같다. 고등학교 12학기 내내 1등이라는 숫자만 보다가 쪽지시험마다 거의 꼴등 혹은 빵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으면서 나는 점점 더 의욕을 잃어갔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당시 나의 절친은 원룸에 옵션으로 딸려있던 작은 TV에서 나오는 '무한도전 파업 중 재방송 시리즈'였다. 그렇게 점점 혼자가 익숙해지고,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 혼자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아졌다. 아주 소수의 친구들과 가끔 밖에 나갔다. 부모님과 통화할 때면 그저 잘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쌓아 올렸던 많은 것을 무너뜨렸지만, 완전히 가루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동아리 활동과 어학연수 덕분이었다. 동아리 사람들과 매주 만나 뒤풀이를 하고, 술자리에서 신나게 토론하면서 '잘해야 하는 것’ 대신 '즐기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현지 수업을 들으며 학점을 따기 위해 고생해야 하는 교환학생과 달리 짧은 어학원 수업 후 도시 이곳저곳을 놀러 다녔던 어학연수 시절은 지금 생각하면 참 가성비가 떨어지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라는 화려한 포장을 생략하더라도, 내 인생의 당도 그래프에서 아마 최고점에 위치할 그때의 추억을 야금야금 녹여먹으며 지금까지도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줄줄이 과거사를 쓴 뒤에는 ' 모든 지지리 궁상에도 불구하고 피나는 노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한 나는 2020 현재 이렇게나 대단하고 멋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짜잔!'이어야 자연스럽다. 아쉽지만 나는 아직도 일주일에 3일 정도는 무기력증을 앓는 집순이고, 당장은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이후 나의 진로를 생각하면 여전히 안갯속이다. 집을 사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어디에라도 일단 집을 사두는 거라는데, 내년 전세 만기 후에 오를 전셋값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아무렇게나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 길어 어지럽혀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 혼자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꺼내어 하나하나 닦아내고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서. 몸은 씻고 꾸미고 화장도 하면서, 정신에게는 예쁘고 따듯한 옷을 걸쳐줄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최소한의 노력이 글쓰기라는 생각이 들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사람을 만날 일이 적어 이제 '투머치토커'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투머치띵커'인 내가 머릿속의 뒤죽박죽 한 생각들을 얼마나 잘 풀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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