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망했다, 짝사랑이네.
토요일은 분위기가 좀 묘했다.
지하철역에서 그를 만났을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늦잠을 잤다길래 “어제는 그래도 평소보다 훨씬 일찍 퇴근하지 않았어요?”라고 물었다. “아 너무 설레서…”라는 답변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소개팅으로 만난 사이였다면 그 말은 의문이 아니라 설렘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 만남에는 ‘이 사람과 이성적으로 발전한다, 하지 않는다’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인의 지인으로 정의될 수 있는 사이로 만나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일까지 같이하게 된 사이에는 ‘남녀 구분 없는 두 개체로서의 사회적 관계’라는 레이블이 있었다. 게다가 몇 번의 대화를 통해 내가 파악한 그의 성격은 플러팅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2030 여성들의 김칫국 소비량 절감을 위한 유튜브 세계의 명언이 있다. ‘남자의 태도가 헷갈릴 때는 그냥 친절한 게이라고 생각해라.’ 성격상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실망하기 싫은 마음이 방어기제가 되어 사이렌을 울렸다.
그 이전의 어떤 신호도 빌드업도 없었기에, 머릿속 서랍 한켠에서 <에이 아닐 거야 상자>를 꺼내왔다. ‘음.. 오랜만에 일찍 퇴근이라 주말이 길어진 게 설레서 늦게까지 잠을 못 잤다는 소리겠지’라고 쓴 뒤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공연장으로 올라가는 버스를 탔다. 비어있는 공간에 그가 섰고 나는 그의 앞에 마주 보고 섰다.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다. 보통의 ‘남사친’들과 대중교통을 같이 탔을 때는 옆으로 나란히 서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은데.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그가 옆에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살짝 잡기만 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조금이라도 그늘로 와요.”
나이를 서른이나 먹었으면 친절한 의도를 동반한 스킨십 정도는 쿨하게 즐겨도 될 텐데, 현실의 나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아.. 아? 어디에도 그늘이 없는 것 같은데요!”
이미 그에게 손을 잡힌 전적이 있었다(그는 그냥 우산을 옮기려 한 거였지만). 그날 나의 어버버거림이 다소 창피했기에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색함 반, 긴장 반으로 이루어진 나는 여전히 뚝딱거리기만 했다.
공연이 끝난 뒤 산책길로 넘어왔고, 나는 그의 왼편에 선 채로 걷기 시작했다. 그가 왼쪽 어깨에 메고 있었던 가방을 천천히 내려 반대편으로 옮겨 들었다.
오랜만에 겪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었다. 산책길 초입에서 가방을 바꿔 메던 지나간 연인들의 면면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 걸리는 것 없이 더 가까이 있으려는 의도가 담긴, 무의식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아, 이건 그래도 분명 호감의 신호인 것 같은데. 머릿속에 살면서 하는 일이라고는 망상밖에 없는 토끼 한 마리가 날뛰기 시작했다. (훗날 친한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그녀는 그 행동이 그냥 정말 누구에게나 하는 단순한 배려라고 평했다.)
착각과 합리화 사이에서 줄을 타던 시간이 끝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관념적인 질문을 던지고 머릿속의 생각들을 꺼내놓는,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졌다. 설렘은 없는 사회인과 사회인의 대화, 내가 좋아하는 류의 대화였다. 직전까지의 긴장이 피로가 되어 남은 걸까. 그와의 대화가 평소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나는 확실치 않은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설레면 선을 긋고 밀어내는 병이 있나 보다. 게이트에서 그를 먼저 내려보내기 위해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는 물품 보관함까지 같이 가주겠다고 했고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던 나는 그 행동마저 의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아, 어차피 같은 방향이구나”라는 맥락 없는 문장을 던지면서.
물건을 꺼내는 동안 보관함 문을 잡아주는 건 내가 남자였어도 남녀노소 상관없이 해줬을 행동이지만, 그 순간조차도 약간은 두근거렸던 것 같다. 내 망상토끼는 한 번 떡밥을 주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
열차 안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그가 건너편 닫힌 문을 마주 보고 섰고 나는 열차의 진행 방향을 바라본 채로 그의 앞에 섰다. 두 사람의 각도는 90도여서 그가 나의 오른쪽 얼굴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가 닫힌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감싸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나도 분명 그냥 선 것 같은데. 사실은 내가 그 자리로 비집고 들어갔던 건가. 헷갈린다.
집에 도착하니 망상토끼가 퇴근하고 이성이 돌아와 있었다. 연락을 계속 이어가다가는 적당한 타이밍에 끊어주지 못할 것 같아서 그의 마지막 카톡을 읽은 채로 대화창을 닫았다.
다음 날 약속에서 친구는 어제 공연을 누구와 갔는지 물었다. 그냥 친구라고 대답은 했지만, 자연스레 어제의 일들이 생각났다. 약속이 끝나고 근처 H언니네 집에 들렀더니 언니가 물었다. “J님이랑 별일 없어?” 언니는 작년부터 올해까지 A언니, K언니와 함께 어떻게든 그와 나를 한 번 묶어보려고 꾸준하고 은근하게 노력했다. 일전에는 “J님 어때?”라고 가벼운 직구를 날린 적도 있었다. 나는 강한 긍정으로 비치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부정했고, 남의 일인 양 장난스레 대답했었다.
집에 오는 길이었다. 망상토끼가 버스보다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 사람의 의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를 너무 많이 생각했고, 그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대하고 있었고, 설렘을 소재로 한 노래들이 와닿기 시작했다.
잘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 누웠다. 스피커에서 자이언티의 5월의 밤이 흘러나왔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밀도 있는 고무공 정도의 무게감이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 망했다. 나 짝사랑하네.’
*어느 날 겪은 일을 짝사랑으로 극화시켜 표현한 글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사건은 실화이고 감정은 픽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요즘 정말 설렐 일이 없어서, 설레는 글을 써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