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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 만한 간호사 Jan 29. 2022

이 시국에 진짜 자리가 없는 곳

중환자실은 항상 자리가 없다. 팬데믹 이후로 상황은 여느 때보다 심각하다.

와야 할 환자는 늘 대기 중이고, 이곳에 있는 환자와 의료진들은 모두 불가피하게 치열하다.

그런 이유로 요즘은 한자리 한자리가 쉴 틈 없이 치워지고, 채워진다.

경험이 제법 쌓여 차지 간호사가 되면, 중환자실 내 환자들의 어레인지를 맡게 된다.

더 이상 집중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환자들을 일반병실로 올려 보내고, 새로운 중환자들을 순서대로 받아내는 일종의 교통정리를 맡게 되는 셈이다.


엊그제 출근해서 전번 차지 간호사에게 인계를 받았다.

"오늘도 풀 베드고 예약환자는 응급실에 두 명 계세요. 전실 가실 수 있는 분은 B 할아버지 한분 계신데.. 보호자분이 일 때문에 오늘내일은 못 오셔서 며칠 뒤에 전원 간다고 하셔요. "


전체 환자 인계를 받고 난 후, 더는 중환자실에 있을 필요가 없다던 B 할아버지의 의무기록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뇌 수술을 받은 뒤, 의식 없이 몇 년이나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흡인성 폐렴이 생겨 중환자실로 입실한 환자였다. 인공호흡기 치료도 끝났고, 염증 수치나 엑스레이상 이미지도 많이 호전되어 손이 갈 일이 없는 분이었다. 보호자가 전실은 못 가고 모레 즈음에야 면담만 하러 잠시 온다기에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올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환자가 좋아져서 올라갈 수 있는데 일이 있어서 못 온다니. 그것도 시간을 못 내다니. 누군들 안 바쁘겠냐고.


생각하는 와중에 마침 B 할아버지의 보호자인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우리 할아버지 어떻게 괜찮은지 좀 물어볼라고요."

"네. 이미 설명 들으셨겠지만 할아버지 상태가 많이 좋아지셔서 더는 중환자실에 계시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보호자 분만 오시면 당장에라도 일반병실로 가실 수 있는데.. 혹시 힘드실까요?"


"내가 정말 미안해요. 선생님. 저도 우리 할아버지 데리고 있고 싶은데, 통사정이 안돼서 그래요. 자식들도 없고 둘이서만 살다가 할아버지가 그 지경이 돼가꼬 식당일을 하면서 돌보고 있었어요. 제가 오늘내일은 기를 쓰고 어떻게 해도 갈 수가 없습니더. 모레는 제가 점심시간까지 일해주고 조퇴해서 가기로 했으니께 그때 꼭 가가 의사 선생님이랑 얘기해서 우리 집 주변 요양병원으로 옮기려고 합니더. 사정 한 번만 봐주세요. 부탁드려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피곤에 젖은, 또 그 와중에 무척 따뜻한 목소리에 벌써 죄송스러웠다. 그제야 할머니가 홀몸으로 의식 없는 할아버지를 돌보아 온 수년간의 고단한 시간들이 그려졌다. 그간 쏟았을 정성과 마음고생. 욕창 하나 없이 깨끗한 할아버지. 그러려면 할머니는 일을 하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온통 할아버지만 신경 쓰고 계셨을 테다. 그럼에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하는 상황이셨겠지.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중간에 식당에서 전화를 한 것처럼 주변 소음이 들렸다. 그 모든 것들이 짧은 통화로도 묵직히 전해져 나는 목에 뜨거운 것이 걸렸다. 더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새벽에라도 한번 가서 면회하면 좋겄는디.. 그래도 선생님들이 잘 봐주셔가 금방 좋아졌네. 고맙습니다. 참말로 고맙습니다."

".... 요즘에는 죄송하게도 면회가 안되어요 할머니. 전원 가실 때까지, 저희가 잘 돌보아 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럼 모레 뵐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하다'는 말에 코끝이 시려 급히 전화를 끊었다. 무엇에 감사하신 걸까. 우리는 근무할 때만 환자를 보고, 근무가 끝나면 친구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책을 읽으면서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그 사이사이에도 병원이나 환자에 대한 생각이 드는 적은 무척 드물다. 할머니는 몸만 병원에만 있지 않을 뿐 하루 종일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걱정했을 테다. 할머니는 그럼에도 우리에게 고맙다고 두 번이나 말했다. 우리 덕분에 할아버지가 좋아졌다고. 그 마음은 어떤 걸까. 한 번도 그렇게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쏟아붓는 시간을 살아보지 않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사였다.


나는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해졌다. 자리가 없는 건 중환자실이 아니라, 내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바삐 돌아가는 병원, 끝도 없이 순환하는 침대들을 핑계로 아무것도 마음속에 들이지 못했던 게 아닌지.

고개를 들어보니 각각의 침대 숫자마다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인생이 누워있었다.

저마다의 사연, 모두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해하려 노력하고 공감할 수는 있는, 어딘가 항상 그 자리를 비워놓을 수 있는 간호사가 되라고, 할머니의 피곤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혼이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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