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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모험의 순간이 있으신가요

교보문고 매거진 『어떤』3호 '여는 글'

by 유테테
부흐링(Buchling)은 책을 먹고 삽니다. 이들은 하루에 세 권에서 다섯 권의 책이 필요합니다. 장편소설 한두 권과 단편소설 한 권, 여기에 수필과 시가 더해지지요. 이따금 잠언집이 후식으로 따라오고요. 하지만 너무 많이 읽으면 부흐링은 뚱뚱해집니다. 읽은 것을 칼로리로 전환하니까요. 그래서 장편소설보다는 시를 읽는 게 좋아요.

- 발터 뫼어스, 『그래픽 노블로 돌아온 차모니아 통신』, 부흐하임 특별판 ‘부흐링이 최고 다독가’ 중



이 문장을 보고 구미가 당긴다면, 당신은 이미 모험가의 자격이 충분하다. 부흐링이 누군데 책을 먹는다는 거야? 소설이랑 시를 먹는다고? 진짜로 먹는 거야? 부흐링을 만나고 싶다면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사이 ‘읽는 자만이 갈 수 있는 땅’ 차모니아로 떠나보자. 이곳에 부흐링이 사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이 있다. 수천 개의 고서점과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불법서점이 있는 도시. 작가와 독자, 서점 직원과 편집자가 뒤엉켜 매일 왁자지껄한 난장을 벌이는 활자 중독자들의 천국, ‘부흐하임’!


이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긴 독자라면 분명 다음 장소에도 가보고 싶을 것이다. 『포스 윙』의 ‘나바르 왕국’,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헤일메리호’, 『피라네시』의 ‘집’은 읽는 자만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아직 TV 시리즈나 영화로 개봉 전이니, 책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보물찾기'를 하거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 '첩보 액션'에 뛰어드는 일도 아주 간단하다. 그저 책을 펼치기만 하면 된다.


모험의 공간들이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주생물학’ 이라는 학문 분야에서는 실제로 외계 생명체 탐사나 유사 외계 환경을 연구한다. 온천, 염호, 황산화 환경을 갖춘 에티오피아의 '다나킬 열곡'은 섭씨 50도 이상의 극단적 고온, 높은 염분과 산성도로 초기 화성과 유사한 환경으로 여겨진다. 남극 '보스토크' 호수는 극한의 저온 환경 속에 얼음 아래 바다가 존재하는 곳으로, 목성의 위성 유로파나 토성의 위성 엔켈라두스와도 비슷한 조건을 갖췄다. 이런 극한의 지역을 모험하는 일은 과학자나 모험가들의 영역이지만 일상에도 모험의 순간은 존재한다. ‘모험의 마음’을 먹는 순간, 익숙했던 일상은 새롭게 보인다. 이제 막 운전을 시작한 초보 운전자에게는 매일 걸어 익숙했던 길이 모험의 여정으로 느껴질 테고, 서울에 살지 않는 친구를 만난 서울 시민은 미로처럼 얽힌 지하철을 헷갈리지 않고 타는 것이 모험적인 도전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인쇄소 기계처럼 반복되는 흑백의 일상에 초록색 푸른 잉크 한 방울 떨어지는(혹은 떨어뜨리는) 일, 그것이 모험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호 ‘얼리어북터’에서 ‘맛의 모험가’ 최강록을 만났다. 그가 말한다. 모험의 경험이 쌓이면 레벨업이 된다고. 새로운 세계를 만날 기대감으로 할아버지가 돼서도 ‘맛의 모험’을 떠날 것이라는 문장에서 문득 어릴 적 과천 시내에 있던 작은 서점이 생각났다. 쇼핑센터 1층 한쪽 벽면이 책장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앞에 서면 무언가 모를 모험심에 사로잡히곤 했다. 가장 좋아했던 서가는 노란색 가이드북을 빼곡하게 꽂아둔 여행 코너로 공항 근처에도 못 가본 꼬마에게 모험심을 불러내기 충분했다. 언젠가 비행기를 탄다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캐나다 밴프(Banff). 내 기억에 밴프가 수록된 캐나다 편은 특히 두꺼운 책이었는데 그 두께만큼이나 상상력을 크게 자극했다. 여행가이드북에 밑줄 긋고 지도를 손으로 짚어가며 나만의 여행을 했더랬다. 그 넓은 캐나다 여러 지역 중에서도 로키산맥에 있는 밴프가 특히 가고 싶었던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루이스 호수’때문이었을까? 기억에서 희미해졌던 캐나다가 다시 선명해진 건 유키 구라모토의 연주곡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가 어린 시절 나를 가슴 뛰게 했던 밴프의 레이크 호수라는 걸 알았을 때다. 그때가 스무 살 무렵이었나. 그때라도 모험의 길을 떠났다면 어땠을까.


그렇지만 비행기를 타지 않더라도 괜찮다. 손에 들린 책을 눈앞에 두면 매 순간 두근거리니까. 조지 R. 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드래곤과의 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 천 개의 삶을 살아, 조젠이 말했다.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면 겨우 하나의 삶만을 살고 마는거지.

A reader lives a thousand lives before he dies, said Jojen. The man who never reads lives only one.


우리는 다양한 삶을 경험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오늘도 출근길에 잠시 헤일메리호에 탑승하고 이놈의 ‘아스트로파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우주에 다녀오는 길이다. 다나킬 열곡처럼 뜨겁고, 보스토크 호수처럼 차가운 하루하루가 모험처럼 흘러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행기 티켓이 아니라 책 속에 등장하는 한 자루의 검과 마법 주문, 우주선일지도. 거기에 ‘모험의 마음’을 더한다면 금상첨화다. 아침에 회사 갈 준비를 하면서 아직 양말도 못 신었는데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이 3분밖에 남지 않았다면 ‘출근길 음식물쓰레기 미션’을 수행할 수 있을까, 없을까. (오늘은 성공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험천만한’ 하루가 계속되겠지만…, 여러분의 모험에도 행운과 기쁨이 있기를!


| 유한태 (교보문고 e커머스영업팀장)




<어떤>은 교보문고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나갑니다. 다음 호 주제에 맞춰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독자 에디터로 선정되신 분은 다음 호에 글과 사진을 실어드립니다.(투고기간은 9월 28일까지)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어떤> 3호 받으러가기' 링크를 눌러 확인해주세요. 고맙습니다. :)

<어떤> 3호 받으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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