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씨리Rhee Jun 11. 2024

영원한 아빠 딸 1

#내사랑 #영원히 #아빠딸 #내딸

내 나이 서른 하나에 딸을 처음 만났다. 한창 과장으로 부서장을 하고 있었고, 회사 일로 정신이 없었던 때였다. 아내가 아이를 낳던 그 당일에도, 현장 관리 감독 건으로 곁을 함께 하지 못했다. 나에겐 직장은 종교였고, 삶의 전부였다. 회장님은 나에게 하느님이었고, 회장님 아들들은 내겐 스승님이었다. 취직을 위해 공고에 진학을 했던 나에게 아버지는 고3이 되던 해에, 대학에 진학을 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1년간 밥을 도시락을 3개를 싸서 학교에 등교를 했다가, 저녁 12시에 하교하면, 어머니가 퍼 주는 밥을 제삿밥만큼 한 그릇을 또 먹고 잠이 들곤했다. 그렇게 공부를 해서 나는 대학에 무난히 진학은 했지만, 1년간 늘여 놓은 위는 하수증에 걸려서 절제술을 받아야했다. 덕분에 군대는 면제를 받아서, 나는 직장에서 나이가 어린 상사축에 속했다.


나이가 나보다 대 여섯살이나 많은 부하 직원 형님들을 모시기란 녹록치 않았다. 그들과의 화합을 끌어 팀의 성과를 내야만 했던 나로서는 어쩔 방도가 없이 형님들을 모두 집으로 죄다 끌어 오곤 했다. 그때마다 아내는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양쪽 어깨가 무겁도록 장을 봐와서 한 상을 차려냈다. 밤새 이어지는 고스톱 놀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이 피워대는 담배 갑과 마시는 소주병 맥주병 수가 늘어날수록 나와 그들은 관계가 돈독해져갔다. 등에 업혀만 있던 딸래미는 어느 새 자라, 종알종알 아빠 아빠 하면서 말을 늘어놓고 재롱을 부리곤했다. 월화수목 금금금 일을 하던 그 시절, 딸래미는 일요일에 나를 따라 회사를 가겠다고 울어서 회사에 데려가기도 했다. 회사내 야유회나 등산 대회가 있는 날에도, 딸은 나와 함께했다. 딸은 야유회 가는 길에 버스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도 했다.


주재원 발령을 받아서 나는 가족들과 해외에 나갔다. 한국 나이로 여덟살, 딸은 학교에 갈 나이가 됐다. 프랑스에 주재를 받았는데, 로칼 학교에 보내느라 프랑스어가 시급해 딸에게 과외를 따로 받게했다. 딸은 천재같이 프랑스어를 금새 배웠다. 딸은 가족들 대변인 통역사가 되었다. 앵두같은 입술로 종알거리며 프랑스어를 하는 딸이 자랑스러웠다. 크리스마스엔 조그만 반지를 사다가 예쁘게 포장해서 딸 머리 맡에 두었다. 딸래미가 통역하며 다닌 여행 중에 루브르 박물관에서 봐둔 왕관을 함께 만들어 딸 머리에 씌워줬다. 쉬폰 분홍 삼단 치마도 입혔는데, 내 눈엔 마리 앙투와네뜨보다 더 이쁘고 빛이나는 공주님이었다.


주재원시절 3년을 채 다 못채우고 나는 한국으로 조기 귀국해야만했다. 아내는 꿈만 같던 외국생활을 종종 그리워했다. 아내는 빠듯한 나의 월급에 살림을 살아내며, 딸 아이 학교 성적에 사활을 걸었다. 추운 겨울 퇴근 길에 나는 딸아이 전화를 받아 필요하다는 문구류를 사서 집에 귀가를 했다. 집에 돌아와 내 눈 앞에 벌어진 광경에는 나는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신도 얘가 얼마나 거짓말을 늘어놓는지 알아야해!" 라며 딸 아이를 쥐잡듯 잡고 있었고, 딸은 울며 불며 아빠 아빠만 반복하고 있었다. 딸 아이는 문제집의 답안지를 모두 베껴놓고는 공부를 다 했다고 뻔뻔스레 거짓말만 하고 있다는게 아내의 요지였다. 아이를 호되게 혼내는 아내의 편도, 당장 혼나는게 억울해서 울고 있는 딸아이의 편도 들 수 없어 나는 어색하게 땅만 내려다보았다.


나의 빠듯한 월급에 힘이 들었던 아내는 부동산 중개사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주말이면 학원에 가는 아내를 위해 나는 집에서 아이들과 오롯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과 고무 동력 비행기를 만들었다. 비행기를 들고 한강 고수부지에 나갔다. 고수부지에서 아이들과 비행기를 날리는 시간을 가졌는데, 딸아이가 그렇게 좋아한다. 비행기를 계속 날려달라고 한다. 어린이날에는 딸아이를 위해서 연필 꽂이를 하나 만들어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내 목공소에 들러서 나무 조각을 좀 얻어왔다. 서로 엇갈리게 쌓아서 본드로 천천히 붙히고, 색종이로 편지를 써 코팅을 해서는 하트모양으로 잘라서 앞에 붙여서 만들어줬다. 딸 아이는 너무 좋아했다.


회사는 바빴지만, 나는 식구들을 위해 시간을 꼭 내려고 노력했다. 회식할 때 맛있었던 곳은 알아뒀다가 꼭 가족들을 데려갔다. 캐나다, 하와이 자유여행도 계획해서 세계문물을 경험시켜줬다. 겨울이면, 회사 콘도를 예약해서 꼭 스키를 태웠다. 여름이면 가까운 산에 데려가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순두부 한 그릇씩을 함께 했다. 이제는 고등학생이 된 딸 아이와 아무데도 가지 못하게됐다. 하지만, 아침 저녁 내가 학교에 등하교를 시켜줄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다.  주말 아침에 내가 아침을 차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건 라면이다. 공돌이 답게, 나는 라면 봉지 뒤에 쓰여있는 설명서를 숙지했다. 세 번 읽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나는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라면을 끓는 물에 면발을 먼저 삶아내면 기름기를 없앨 수 있다 한다. 지금 한참 살이 찌고 있는 딸아이를 위해 기름기를 없이 끓여준다. 여행은 함께 못하지만, 딸을 위해 무엇인가 하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대학 수능이 며칠 안남았다. 그간 열심히 해줬는데, 수능까지 힘내라고 비타민 씨와 짧은 편지 한장을 써 준다. 딸 아이는 내가 써준 편지들은 곱게 책상 서랍에 간직해둔다. 참 고맙다. 와 수능이 대박이 났다. 처음에는 딸 아이 성적을 듣고 '또 거짓말하고 있네.'라는 생각에 피식 웃고 말았는데. 우리가 예상했던 학교보다 너무 학교를 잘 갔다. 정말 우리 집에 평화가 찾아왔다. 더 이상 퇴근 길이 무섭지 않다. 쌍커풀 수술을 하고 다이어트 음료를 마시며 아내와 깔깔거리고 웃고 있는 나의 딸은 행복을 되찾았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아이스크림과 어리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