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진학한 딸은 항상 귀가가 늦다. 오늘도 아내는 좌불안석이다. "얘 지금 통근 시간 넘겼잖아!" 힘들게 대학을 갔는데, 귀가 시간좀 늦는게 무슨 대수라고. 나는 아내가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언제나 아내의 의견을 존중했던 터라 오늘도 별 말 없이 조용히 옆에 앉아있다. 딸은 저녁 10시를 넘겼고, 급기야 아내는 현관문 보조 잠금장치를 잠그고 열어주지 않는다. 포기한 딸 아이는 아마 현관 앞에서 앉아있는 것 같다. 이럴때 고집스러운 아내가 조금은 밉기도하다. 딸은 통학 거리가 멀고 통금까지 있어서 대학생활을 제대로 즐기고 있지 못하는 듯 했다. 항상 학교만 왔다갔다 했지, 별반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영어 공부를 안하는 것 같다. 나는 우리 딸을 아들처럼 생각해왔던 터였다. 항상 듬직했고, 나의 엄마 그리고 아내와는 달리 자신의 직장을 갖고 커리어를 갖는 여성이 되어서 주체적으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강했다. "여자도 직업을 가져야해." "나중에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더라도, 엄마 아빠 용돈은 네가 직접 번 돈으로 줄 수 있어야해."라고 항상 강조해왔다. 내가 오랜 직장생활에서 항상 힘들던 것은 '영어'였다. 내 딸 아이는 앞으로 직장생활에서 영어 때문에 발목 잡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미국에 영어 연수 보낼만한 학교를 알아봤다. 내 가까운 후배가 가 있는 지역의 학교를 물색했고, 기숙사 학교에 1년을 보내기로 했다.
딸에게 말했다. "너 적은 돈으로 보내는거 아니야. 다녀와서 토익 900점은 넘겨야해!" 딸이 먼 땅에 가서 놀기만 하고 시간을 버리고 올까봐, 으름장을 놓았다. 매주 한 번씩 영어로 이메일도 나에게 써 보내기로 약속을 받고 보냈다. 미국에 도착한 딸은 잘 지내는 것 같았다. 후배를 통해서 소식도 가끔 들었다. 듣자하니, 딸이 스무살이 되어 성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딸 생일에 맞추어, 향수와 옷 가지를 챙겨보냈다. 작년만해도 통금을 지키지 않느다면서, 죽이네 살리네 하던 아내도 김치를 정성껏 담그어 미국에 있는 딸에게 함께 보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후배 회사에서 일도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도 했고, 운전면허도 따도록 격려도 했다. (운전면허는 끝까지 따오지 못했다. 세번이나 낙방을 했으니, 아마 운전에는 소질이 없나보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한국으로 귀국한 딸아이는 엄청 성장해서 돌아왔다. 그런 딸이 내겐 그렇게나 대견스러웠다. 대학 졸업반이었다. 직장에 면접을 보러 가는 날, 나는 온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얘가 면접을 잘 볼 수 있을까? 시사 상식이 한개도 없는데, 무식이 들통나지 않을까? 주변의 기에 눌려 목소리는 개미만하게 하면 어쩌지? 아내를 통해 면접 볼 수 있게 정장도 사 입혔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나의 엄청난 우려와는 달리 직장에 입사를 했다! 정말이지 꿈만 같았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아빠 발음을 겨우 내던 딸 아이가 직장에 입사한 사회인이라니, 감격스러웠다. 이제는 좋은 신랑감을 만나서 결혼만 잘 하면 될 것 같다.
대학에 입학 했을 때와 같이 집안 분위기는 다시 좋아졌다. 입사 직전까지 딸아이는 아내와 긴장감이 팽팽하던 시간을 보냈던터였다. 입사 후 회사 동기애들과 엠티를 다니고, 딸 아이는 뭔가 생기 발랄해졌다. 딸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내 마음도 핑크빛으로 부풀었다. 딸은 영어공부도 다시 열심히 하는 것 같았고, 돈을 벌자 아내와 둘이 해외여행도 계획했다. 그런데 갑자기 직장 3년차에 결혼을 하겠다며 어떤 녀석을 데려왔다. 마음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딸은 이제 스물여섯이었다. 딸의 성화에 내가 그 놈을 한번 만나봤다. 그 놈은 꼭 도둑놈같이 생겨서 금방이라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을 훔쳐갈 것만 같이 생겼다. 그러니 도둑놈 맞다. 딸에게 나는 반대를 했다. "너하고 결혼을 하기로 목표를 삼은 것 같은데, 친구로 지내는게 좋겠다!" 나는 눈에 힘주어 딸에게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