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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May 28. 2023

자기 나이의 삶

23년 2월에 발행했던 작품을 퇴고하여 재 발행하는 글입니다.



지난주에 풋살을 했다. 5명을 한 팀으로 3개 팀이 돌아가는 게임이었다. 두 팀이 경기를 하면 한 팀은 쉬고 그게 다시 순환하는 식이었다. 근데 15명 중 절반 이상이 고등학생이었다. 친구 무리가 단체로 참여한 것이다. 사회에 나온 이후로, 아마 삼십 대가 넘어서 인 것 같은데, 나보다 어린 사람들의 나이를 구분하는 게 쉽지 않다. 풋살장에 온 그들을 보고도 대학생인지 아니면 고등학생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하지만 골격이 완성되지 않았고 피부가 여린 걸로 보아 성인은 아닌 것 같았다. 몇 명은 빨간 여드름을 얼굴에 달고 있었다.


그중 한 명에게 물었다.

 

"혹시 몇 살이에요"

 

"열여덟 살이요"

 

정확한 정답이었다. 주관식 수학 문제를 맞힌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조금 헷갈렸지만 고등학생일 것 같았고 그중에서도 2학년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답을 맞혔다는 기쁨도 잠시, 시간이 하릴없이 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8살이면 나보다 16살이 어린데 그렇게 따지면 이 친구들보다 거의 두 배를 살아온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데 16년이면 무엇이 변할까. 16살이나 차이나는 이 친구들과 같은 공간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한 겨울이라 날씨가 많이 추웠다. 어떤 사람들은 비니에 넥워머를 쓰고 풋살을 했고 나도 방한 장갑에 옷을 여러 겹 입고 운동을 했다. 근데 학생들은 전혀 달랐다. 아무도 장갑을 끼지 않았고 어떤 녀석은 반바지를 입고 뛰어다녔다. 한 친구는 팔 소매를 걷고 뛰었는데 저럴 거면 긴팔은 왜 입고 나왔는지 이 날씨에 저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겨울에 야외 운동을 할 때는 장갑이 필수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는 마음이었다.


'자기 나이의 삶'이라는 게 있을까. 신체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는 나이. 십 대에는 사춘기를 겪고, 이십 대에는 진로를 고민하며, 삼십 대에는 결혼을 하고, 사십 대에는 육아에 힘쓰는, 그런 삶의 모습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나도 고등학교 때는 저 친구들과 비슷했다. 겨울 날씨에도 긴팔티에 반바지 하나만 입고 축구를 했다. 삼십 대가 넘은 지금이야 그게 불가능해 보여도 나도 맨살을 내놓고 뛰어다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저렇게 뛰어다니는 건 자기 나이의 삶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밥을 두 공기 먹어도 배고프고, 첫사랑의 한마디에 목 매이며, 겨울에 반바지를 입어도 몸이 뜨거워지는, 그런 십 대 청춘의 나이를 살고 있던 것이다.


삼십 대 중반의 자기 나이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이 나이는 친구들과 조금씩 멀어지는 나이인 것 같다. 한 달에 한번 만나던 친구를 두 달에 한번 본다든지, 매일 연락하던 친구와 이제는 연락이 뜸해진다든지, 그런 것이다. 별로 안 친하던 인연과는 연락이 끊기기도 하고 대화가 수시로 쌓이던 채팅방에는 정적이 흐르기도 한다. 삼십 대 중반에 겪는 '자기 나이의 삶'에는 '친구들과의 멀어짐'이라는 게 있다는 것이다.


스물두 살 때 군대 훈련소에 입소하는 친구를 배웅해 준 적이 있는데 그때 친구 아버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 너네 관계가 보기 좋다. 하지만 살다 보면 한번 더 굴곡을 지나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걸 잘 넘기면 평생 함께하는 친구가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당시에도 그 말씀에는 인생을 관통하는 어떤 울림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님이 이야기하신 그 굴곡의 시기가 지금의 나이인 것 같다. 삼십 대 중반이 되니 이제는 관계가 조금씩 좁아진다. 사회생활에 지쳐서 퇴근하고 누굴 만날 바에야 그냥 쉬는 게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 초년생 때야 퇴근하고도 친구들을 자주 만났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한다. 친구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냥 집에 가서 멍하니 쉬는 게 제일 좋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중간 한 관계는 이제 연락이 끊겨 조용히 사라지고 친한 친구들과도 연락이 뜸해진다. 게다가 이제는 친구들도 제짝을 찾아 하나둘씩 결혼을 하고 나도 곧 있으면 결혼을 예정하고 있다. 각자의 가정이 생기면 만날 시간은 더 줄어들고 육아까지 하게 되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반년에 한 번이나 일 년에 한 번만 봐도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물론 '자기 나이의 삶'이라는 게 모두가 똑같은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삶이 있고 살아가는 방식도 모두가 다르다. 나와는 다르게 십 대 때도 옷을 꽁꽁 싸매 입던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삼십 대가 넘은 지금에서야 진짜 친구를 만나 우정을 쌓고 관계를 돈독히 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결혼이 싫은 비혼주의자도 있고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딩크족도 요새는 많다. 각자가 가진 다양한 삶의 모습을 무시하고 신체적인 나이, 사회적인 나이에 따라 모두에게 공통된 모습이 있다는 걸 주장하고 싶은 건 아니다. 게다가 그런 나이에 맞추어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십 대에는 공부를 해야 하고, 이십 대에는 꿈을 가져야 하고, 삼십 대에는 돈을 모아야 하고, 사십 대에는 집이 있어야 한다,라는 틀에 박힌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반가움' 때문이다. 학생들이 맨살로 뛰어다니는 걸 보았을 때 나 역시 그럴 때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반가웠다. 덕분에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릴 수 있었고 그때의 나를 만난 것 같아 기뻤던 것이다. 당시에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십 대였던 물리적인 나이 때문이고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아가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 삼십 대 중반인 지금을 돌아보았을 때 무엇을 반가워할 수 있을지, 그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지금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지금의 나이이기에 할 수 있는 것, 지금의 나이가 지나면 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아무래도 삼십 대가 좋은 건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도 아니고 뭔가가 완성되었다고 하기도 어려운 나이이기 때문이다. 이십 대 때는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몰랐고 사람들과의 별거 아닌 갈등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외롭고 피는 끓는데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도 몰랐고 내가 좋아하는 건 뭔지 어떤 일에 열정을 쏟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방황의 끝에 이제는 나만의 가치관과 기준이 생겼다.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앞두고 있고 평생을 노력하고 싶은 글작가라는 꿈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 것들의 모양이 정해져 완성된 나이라고는 할 수 없고 아니고 이제 시작하는 단계로 설레면서도 걱정도 되는 그런 시기에 있다는 것이다. 마라톤 선수가 오랫동안 몸을 만들고 어느새 시합 당일이 되어 출발 선 앞에 서 있는 기분이랄까. 하늘의 새도 놀랄 출발 신호가 울리면 단련된 종아리와 준비된 심장을 믿고 이제는 앞으로 뛰어갈 준비가 된 단계. 삼십 대 중반이란 그런 나이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나이라고 마냥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친구들과 멀어지는 게 아쉬운 나이이기도 하고 마냥 어렸을 때처럼 많은 일들에 열정이 생기는 나이도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겁은 늘고 따지는 건 많아지며 선입견은 견고해진다. 조금만 먹어도 뱃살이 늘고 거울을 보면 알게 모르게 눈가에 주름이 보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자연스러운 변화고 그게 아쉬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집착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의 나이이기에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친구들과의 멀어짐에 대해서도 앞으로는 어떤 방법으로 그들과 함께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론은 이렇다. 삼십 대 중반인 이 나이를 사랑하고 싶다는 것이다. 십 대를 그리워하고 싶지도 않고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사십 대를 기다리고 싶지도 않고 오십 대를 꿈꾸고 싶지도 않다. 그저 삼십 대 중반인 지금. 결혼을 앞두고 있는 지금. 나의 글세계가 커져가는 지금 이 시간을 사랑하고 싶다. 이런 내 서른네 살에 최선을 다할 때 조금은 더 나답고 조금은 더 행복한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맨살을 내놓고 뛰어다니는 학생들을 보며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다고 나도 그러고 싶냐,라고 하면 그건 아니다. 그게 부럽지도 않고 그럴 수 없음이 슬프지도 않다. 그게 내 나이이고 그게 나의 지금이다. 나의 서른네 살을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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