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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처마에 내리면

by 추세경

22년 10월에 발행했던 작품을 퇴고하여 재 발행하는 글입니다.



여자 친구와 생일이 같다. 나이는 내가 두 살이 많지만 하늘이 맑은 10월 초순에 우리는 태어났다. 처음 데이트를 했던 날 2차로 갔던 어느 와인 가게에서 그걸 알게 되었다. 10월에 태어났다는 여자 친구의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날짜를 물어봤고 완전히 생일이 똑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에 그녀는 나에게 장난치지 말라고,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서로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웃음을 참고 있는 나의 살짝 벌어진 윗입술에는 아직 말하기엔 쑥스러운 하나의 단어가 걸려 있었다. 운명, 이라는 단어다.


우리는 3번의 생일을 함께 했다. 여자 친구는 케이크를 좋아하는데 생일이 같으면 케이크를 먹을 기회가 한번 준다고 농담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아마도 여자 친구도) 서로가 서로를 축하할 수 있어서 더 행복한 생일을 보내고 있다. 때때로 행복은 단순한 것이라 자꾸 행복을 말하다 보면 정말로 그렇게 된다. 너의 생일을 축하해, 나의 생일 축하해, 우리의 생일을 축하해,라고 말하다 보면 어떤 충만한 마음이 생긴다. 인생을 스쳐가는 많은 날들 중에 행복을 확신할 수 있는 날이 1년에 하루라도 있다면 그래도 살만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행복을 가장 가까운 사람과 나눌 수 있다는 건 정말로 감사한 일이다.


우리는 생일마다 등산을 함께했다. 첫 번째 생일에는 설악산 대청봉을 올랐고 두 번째 생일에는 지리산의 노고단을 올랐다. 그리고 세 번째 생일에는 소백산이었다. 등산도 하고 여행도 할 계획으로 하루 전날 짐을 챙겨 단양에 내려왔다. 숙소는 한옥으로 지어진 펜션이었다. 단양에 위치한 <보상재>라는 곳이었는데 파란 잔디의 앞마당과 정갈히 뻗은 처마가 밤을 밝히는 달빛 아래 우리를 반겼다. 거기서 묶고 아침 일찍 등산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아침 7시에 <어의곡 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의곡 탐방지원센터>에서 비로봉으로 향하는 코스였다. 7시에 출발해 나름 일찍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올라갈 때도 이미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젊은 커플도 있었는데 도대체 몇 시에 산을 올랐길래 이 시간에 내려올 수 있을까, 라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해가 안 된다기보다는 그들의 부지런함을 질투하는 마음이 있었다. '여섯 시에 일어나 일곱 시에 출발한 우리는 대단해'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들이 우리보다 더 이른 시간에 출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르른 산세와 맑은 계곡물을 바라보니 그런 마음도 이내 누그러졌다. '참 대단한 사람들이네'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산을 오니 마음이 좋았다. 어떤 해도 마찬가지지만 올해도 역시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이 폭락해서 모아 두었던 돈을 많이 잃은 상황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어 많이 당황스러웠다. 신혼집의 은행 대출을 위해 이래 저래 발품을 팔았고 계약이 확정되고는 이사를 위해 자취방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회사에서는 같이 일하던 후배가 그만두어 일이 늘어난 상황이었다. 이제 3년 차에 접어든 글쓰기도 놓을 수가 없었다. 운동도 계속해야 했고 책도 꾸준히 읽고 싶었다. 일상의 사건들이 줄다리기의 반대편에서 나를 잡아당겼고 거기에 지지 않기 위해 힘을 주고 버티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그렇게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역시나 가을 산에 오르니 마음이 편해졌다. 오후에 비 소식이 있어 공기에는 습기가 가득했지만 물을 머금은 시원한 공기가 피를 맑게 했다. 그간 쌓였던 안 좋은 기운이 몸의 구멍구멍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내 앞을 올라가는 여자 친구를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을 다친 적도 있고 산을 자주 오르는 것도 아닌데 쉬고 싶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무릎이 안 좋으니 등산 대신 트레킹을 하는 게 어떻냐고 물었지만 여자 친구는 등산에서 느끼는 성취감이 더 좋다고 했다. 무릎이 조금 아파도 등산을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등산 짐은 가방을 하나만 챙겨서 내가 주로 들었지만 여자 친구는 자기도 들고 싶다며 나에게 가방을 달라고 했다. 그렇게 가방을 가져가 등에 바짝 매고는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팔을 앞뒤로, 기역자 모양으로 씩씩하게 저었다. 그녀가 힘들다는 건 어쩌면 혼자만의 착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두 시간 정도 산을 오르자 기온이 급격히 내려갔다. 바람이 많이 불어 날씨가 마치 한 겨울 같았다. 옷을 한 겹 더 입고 후드 티의 모자를 뒤집어썼다. 절벽의 경치가 예쁘다는 능선에 올랐지만 안개가 산에 걸려 발아래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좁았고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 달리기를 즐기는 러너에게나 익숙할 듯한 안개였다. 그래도 한걸음 한 걸음 올라 어느새 정상에 도착했다. 비로봉 비석에서 사진을 남겼고, 다른 분들의 사진을 찍어드렸다. 기분이 좋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정상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풍기는 김치 냄새가 싫었고 강하게 부는 바람에 몸이 떨렸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모습의 예쁜 정상은 아니었다.


숙소에 내려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온돌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아무런 걱정도, 어떠한 조급함도 없었다. 한옥의 나무 냄새가 방 안에 고요함을 더했다. 깊은 잠에 들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이제는 그저 남자 친구, 여자 친구, 가 아니라 부부라는 이름의 가족이 되어가고 있다. 프러포즈를 했고, 예식장을 구했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고, 상견례를 했다. 신혼집을 구했고, 이사 준비를 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왜 사람들이 결혼은 현실이다,라고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일이다. 일상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작은 습관 하나까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화장실 배수구에 쌓이는 머리카락은 얼마에 한 번씩 치워야 하는지 서로 간에 협의가 필요하다. 스웨터를 옷걸이에 걸어서 보관하는지, 아니면 서랍에 접어서 보관하는지, 상호 간에 합의가 필요하다. 결혼에 대한 나의 생각이 서로에게, 그리고 각자의 부모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해야 한다. 나의 말과 행동이 나 혼자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함께하는 상대방과 그녀의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건 상대방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심하지 않으면 숨어있던 갈등의 씨앗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 아직 결혼 전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하나하나, 느끼고 있다.


잠에서 깨니 창 밖으로 빗소리가 들렸다. 하산할 때 시작된 빗줄기가 어느새 굵어져 마당의 잔디를 적시고 있었다. 문을 열어 크게 한번 공기를 들이마셨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평화로운 한옥마을에 가을의 정취를 더하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깨 정신이 없었지만 비 내리는 풍경은 마냥 좋았다. 하지만 낭만은 낭만일 때 아름다운 법인지 금세 추위를 느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여자 친구는 아직 곤하게 자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앞으로도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며 우리의 인연을 축복할 것이다. 무릎 보호대와 등산 스틱을 챙겨 물 맑고 공기 좋은 어느 산을 오르내릴 것이다. 순발력과 끈기를 가진 여자,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남자, 그 둘은 서로의 간격을 확인하며 앞으로도 주어진 길을 함께 할 것이다. 결혼을 하면 지금까지 와는 다를 수도 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과 내딛는 걸음의 깊이가 달라질 수도 있다. 그 안에 담길 우리의 찬란한 생에 대하여 우리는 함께 할 준비가 되어있을까. 확신이야 못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자신 있다. 그녀와 함께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곤히 자고 있는 여자 친구를 바라본다. 처마에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차가운 공기가 머리를 울린다. 하늘이 맑았을 어느 가을날, 우리는 태어났다. 운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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