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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Jun 18. 2023

봄 사랑 벚꽃 망고

22년 5월에 발행한 글을 퇴고하여 재발행하는 글입니다.


여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나는 서른세 살이고 여자 친구는 두 살 어리다. 20년 6월부터 만났으니 2년이 되어간다. 프러포즈는 혜화동의 1인 레스토랑에서 했다. 4월의 봄날이었고, 식당으로 가는 주택가 골목에서는 봄의 꽃봉오리가 우리를 반겼다. 코스 요리를 먹고 디저트 타임이 되자 식당의 조명이 조금 더 은은해졌다. 나를 도와주던 셰프(이면서 사장)님이 나에게 신호를 준 것이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몰래 준비해 둔 꽃과 선물을 꺼냈다. 배경음악으로는 여자 친구가 좋아하는 쳇 베이커의 'I fall in love too easily'이 흘러나왔다. 여자 친구는 울었고, 나도 울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다.


여자 친구를 '망고'라고 부른다. 볼살이 예쁜 얼굴형이 과일인 망고를 닮았다. 우리는 경상남도 통영에서 만났다. 둘 다 서울에 살지만 여행을 와서 같은 숙소에 묵게 된 것이다. 전화번호를 주고받았고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처음에는 종로에서 만났고 그다음은 강남에서 만났다. 또 한 번은 한강에서 만났고 다시 한번은 종로에서 만났다. 4번째 만난 날, 우리는 사귀었다. 처음으로 손을 잡았고, 잡은 손에 입을 맞췄다. 달 밝은 밤 초여름의 밤공기는 시원했다.


여자 친구를 사랑한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다. 첫사랑이라는 것도 해봤고, 연애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처음이다. 깊다고 해야 할까, 성숙하다고 해야 할까, 이성으로서의 사랑, 친구로서의 우정, 보살핌을 받는다는 따뜻함, 보살펴 주고 싶다는 책임감, 함께한다는 동료애, 이 모든 감정을 합친 마음이다. 여자친구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신파적인 감상, 인간극장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사랑이야,라고 하기에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모르는 사람에 대한 순간적인 열망이나 혼자가 싫어서 느끼는 성적인 갈망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말하는 '사랑'처럼, 알랭드 보통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이야기하는 '성숙한 사랑'처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반려자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런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고, 감사한 일이다. 망고는 맑은 눈을 가졌다. 환하게 웃을 때면 색 밝은 입술 사이로 하얀 치열이 반짝인다. 그녀를 사랑한다.


나에게는 안 좋은 습관이 있다. 왼쪽 뒤통수에 있는 머리카락을 뽑는 일이다. 손으로 머리를 만지작 거리다 순간적으로 그걸 뽑는다. 중학교 때 외고 입시를 준비하며 생긴 습관인데 벌써 십수 년째 이러고 있다. '발모벽'이라고 하는 충동조절장애의 일종으로 머리를 만지면서 긴장감을 줄이고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동이나 청소년기에 주로 시작하고 심리적인 요인과 생물학적인 요인이 복합적(이라는 건 아주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으로 작용하여 발병한다고 한다. 괜히 심각해 보이지만 쉽게 말해 안 좋은 습관을 가졌다는 것이다. 손톱을 물어뜯는다거나 다리를 떠는 것, 그런 것과 비슷하다. 안 좋은 습관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믿기에 그다지 심각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같은 곳만 뽑다 보니 그 위치에는 더 이상 머리가 자라지 않는 것이다. 직접 만드는 땜빵이다.


오랫동안 나를 알아온 지인들은 아직도 머리를 뽑느냐고 묻는다. 친구들은 나를 놀리고, 엄마는 이걸 안쓰러워하신다. 회사의 한 과장님은 나에게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며 그러지 말라고 하셨다. 나도 이제는 그만하고 싶은데 몸이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단적으로는 졸리기만 해도 머리에 손이 올라간다. 잠잠한 시기도 있지만 한번 만지기 시작하면 한 동안은 계속 만지작 거린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런 걱정 자체가 나에게는 스트레스일 때도 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이런 건 고쳐야 한다고, 왜 그러냐고 핀잔하지 않는다. 그냥 그럴 수도 있다고, 괜찮다고 해준다. 이 또한 내 모습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나의 모든 부분에 대해 이런 태도다. 나의 외모, 성격, 행동, 습관, 취미, 인간관계, 등등, 나의 모든 걸 괜찮다고 해준다. 부족한 모습은 부족한 대로, 괜찮은 모습은 괜찮은 대로 이해해 준다. 언젠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을 하기로 했으면 보듬어줘야 한다고 말이다. 사실 티격태격할 때 들었던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한마디에서 그녀가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알고 있다. 내 모습이 모두 괜찮아서 나를 그렇게 대해주는 건 아니라고 말이다. 망고는 노력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기로 한 이상 보듬어줘야 한다고, 그런 마음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말과 생각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그걸 실천하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감사하고, 그런 그녀를 존경한다.


망고의 볼에 얼굴을 맞대면 그녀의 살 냄새가 난다. 한 겨울의 포근한 이불처럼, 어려서 베고 누웠던 엄마의 허벅지처럼, 그 포근함에서 나는 영혼의 위로를 받는다. 어쩌면 이건 살아 있음에 대한 감각이고 근원적인 생의 위로이다. 이곳에 내가 존재하고, 내 곁에 그녀가 존재한다, 랄까. 망고의 볼에서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의 행복은 그녀의 볼살에 있다.


결혼을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자꾸 나를 비난하는 아내와 자꾸 나를 멸시하는 남편. 습관 하나하나가 불편하고 서로의 자존감을 낮추는 관계. 자꾸 귀찮게 하는 시댁과 자꾸 의지만 하는 처가. 이제는 설레지도 않고 같이 있으면 왠지 불편한 사이. 돈 쓰는 습관도 다르고 청소하는 주기도 다르고 선호하는 음식도 다른 부부. 그런 다름을 틀렸다고 말하는 남편과 자꾸 나를 고치려는 아내. 요새는 이혼도 많다지만 그것도 남의 일일 때 쉬운 거지,라는 생각이 드는 사이. 어쩌면 망고와 나의 결혼도 연애할 때 마냥 그저 순탄하고 행복하기만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앞에 나타날 여러 곡절에 대하여 서로 솔직하게 대화하고 신중하게 배려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의 오십 년, 육십 년을 서로 아끼며 행복할 수 있다.


그래도 그녀와 함께라면 자신 있다. 지금처럼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 준다면 어려운 일들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은 뜨거운 에스프레소 위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얹는 일이다. 온도와 향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새로운 풍미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망고와 내가 만들 새로운 인생이 어떤 향을 만들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그래도 어느새 봄이 왔고 만개한 벚꽃에 마음이 울렁인다. 봄은 그 자체로 설레는 존재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망고를 만나고 내 마음은 언제나 봄이었다. 그녀가 나의 아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망고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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