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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세경 Aug 11. 2023

글쓰기, 이렇게 해도 되나요?

춤을 추고 있을 때는, 규칙을 깨도 돼.
규칙을 깨는 게 가끔은 규칙을 확장하는 거지.
 규칙이 없을 때도 가끔 있어.

– 메리 올리버 「세 가지를 기억해 둬」


글쓰기 노하우에 대한 글이다. 20년도부터 글을 썼으니 3년 8개월 동안 글을 썼다. 경력은 짧지만 100편 넘게 글을 썼고 그것들을 모아 두 권의 책을 냈다.(한 권은 2주 뒤에 나온다) 숫자로 따지면 한 달에 2.5편의 글을 쓴 것이다. 회사원이라 출근 전과 퇴근 후에 글을 쓴다. 하루에 두세 시간은 꼬박 썼고 지키지 못한 날도 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일요일이나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공휴일에는 하루 종일 글만 쓰기도 했다. 그러니 퉁치면 뭐, 매일 두세 시간씩 글을 썼다고 할 수 있다.


글쓰기를 배운 건 아니다. 글쓰기를 정식으로 배웠냐는 질문을 받으면 '배운 적이 없다'라고 답한다. 사실 대학교 1학년 때 기초 교양으로 글쓰기 수업을 들었고 군대를 전역하고 2달 정도 소설 쓰기를 배운 적도 있다. 그런 것도 배운 거라고 따지면 배우긴 배웠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정식으로 글쓰기를 배웠다'라고 하기엔 고개가 갸우뚱한다. 그렇다고 '왜 안 배운 척해'라고 생각하는 분에게 '그건 절대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앞으로도 누가 묻는다면 '배운 적 없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여러분은 속았다. 글 쓰는 노하우에 대한 글이지만 사실 '쓰는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글 쓰는 노하우에 대한 글에서 '쓰는 방법'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모순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순은 언어 표현의 한계일 뿐이지 진실일 때가 많다. 쓰는 방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면, 쓰는 방법보다 중요한 건 '쓰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쓰는 방법을 고민하기보다는 스타벅스 탁자에 앉아 한글자라도 쓰는 것, 자기가 봐도 별로인 문장이라도 일단 쓰는 것, 그게 중요하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어떻게 쓰냐를 고민하지 말고 일단은 쓰라는 것이다.


어떻게 쓰냐,에 대해 가르치는 책은 많다. 하지만 그런 책들을 열심히 본다고 해서 글을 잘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주식 투자 비법서가 많다고 해서 주식 투자를 잘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본질을 모르는 책도 많고 본질이 아닌 것을 본질인 양 포장하는 책도 많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책도 많다). 글쓰기 방법론에 대한 책을 보면 몇 가지 팁이 나온다. 에세이를 쓸 때는 '나는'이라는 말은 쓰지 말라든지, '~할 것이다'라는 말은 글쓰기 초보나 하는 실수라든지, 좋은 글이 되려면 유명한 사람의 '명언'을 넣어야 한다든지, 그런 것들이다. 한번 더 강조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말이다. 그런 규칙들이 두려워 글을 쓰지 못하는 것보다는 그게 무엇이든 일단 써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쓴 글이 별로라고 느껴져도 일단은 쓰는 게 중요하다.


글쓰기의 핵심은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는 일이다. 자기 안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일이다. 내 안의 생각이나 감상, 경험이나 느낌, 의식과 무의식, 책에서 느낀 문학적인 향수, 영화가 건드린 내 안의 어떤 것, 그런 것들을 언어라는 수단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건 그것들을 '드러낼 수 있느냐'이지 '그걸 어떻게 드러내느냐'가 아니다.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싶으면 춤을 추면 된다.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그림을 그리고, 축구를 하고 싶으면 축구를 하면 된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는 기술적인 요령이지 본질이 될 수는 없다. 방법론의 무게에 짓 눌리면 안 된다.


글쓰기가 어려운 건 창작이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쓰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연필로 종이에 적든, 손가락으로 타자를 치든, 손의 감각을 이용해서 쓴다. 그런 행위에는 마법 같은 힘이 있어 그걸 통해 작가는 더 깊은 스스로의 내면에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서 만난 무언가를 다시 글로 옮기고 그런 물리적인 감각으로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간다. 그런 발산과 수렴의 반복으로 글은 확산되기도 하고 깊어지기도 한다. 그 과정은 몰입이며, 신기한 것은 몰입을 하다 보면 글이 저절로 써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실 글쓰기 규칙이 전혀 필요 없는 건 아니다. 속에서 끄집어낸 날 것의 생생함을 세상에 보여주려면 퇴고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때는 기술적인 요령을 알아야 하고 글쓰기 방법론이 도움이 된다. 문장을 더 부드럽게, 잘 읽히게, 군더더기는 없이, 그렇게 만들면 좋다. 하지만 그게 본질은 아니다. 초보자든, 숙련된 작가든, 글 쓰는 사람에게 중요한 건 자리에 앉아 일단 글을 쓰는 일이다.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바다를 살피고 그곳에서 무언가를 건져내는 일이다. 그건 손가락이 해야 할 일이고 엉덩이가 해야 할 일이다. 사실 몇 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체력이 필요한 일이며,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한없이 피지컬적인 업(業)'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래야만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고 나중에 그렇게 쓴 글을 보면 '내가 이런 글을 썼다고?' 하며 놀랄 때도 있다. 손가락과 엉덩이의 마법이 작용한 것이다.


이런 내 주장은 문학적인 글쓰기에 한정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추세경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일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글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다른 글쓰기를 해본 적도 없다. 내 주장은 그저 내가 경험한 실감에 근거한다. 증명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다른 글작가들에겐 나의 주장이 근거 없는 멍청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세상에는 여러 글쓰기가 있다. 여러 규칙 속에 의미를 만들어 내고 그걸 해내야만 인정받는 글도 있다. 학자들이 쓰는 논문은 인용구 하나하나의 출처를 밝혀야 하고 그게 논문 쓰기의 기본이 되기도 한다. 규칙 안에서 완성되는 글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나의 글쓰기가 달라질 일은 없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글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글을 쓸 것이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내 주장에 영감을 받는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아직 한 문장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세상의 언어가 아닌 나만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다. 나를 표현하고, 나의 바다에 다가가고, 그걸 표현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기고, 알리는 게 나의 행복이다. 그게 나의 자유이다. 그러니 규칙을 깨도 된다. 중요한 건 발견하는 것이다. 쓰는 것이다. 드러내는 것이다. 끄집어내는 것이다. 쓰기 전에는 그게 어떤 모양인지 짐작할 수 없다. 나도 몰랐던 흰 수염 고래가 나의 바다의 저 밑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 다가가, 그걸 더듬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 그냥 쓰면 된다. 그게 뭐든, 그냥 써보면 된다. 그게 중요하다.

글을 쓰고 있을 때는, 규칙을 깨도 돼.
규칙을 깨는 게 가끔은 규칙을 확장하는 거지.
규칙이 없을 때도 가끔 있어.



두 번째 책을 출간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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