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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한 May 08. 2024

#24 <애프터 양>

이것이 없다면 각자의 생에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포 有)


 #24 <애프터 양>

  이것이 없다면 각자의 생에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요즘 프리랜서 동료가 한 명 생겼다. 같은 업계는 아니지만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대가 형성됐고, 덕분에 연이 닿아 급격히 친해지고 있는 중이다. 그 친구가 파워J인 바람에 매번 헤어지기 전 다음 만나는 날짜를 정해놓는데, 이게 의외로 신나고 기분 좋은 부분이다. 왜냐면 그게 우리가 보낸 시간을 서로가 마음에 들어 했다는 점, 주기적으로 만나는 게 좋겠다는 점에 둘이 동시에 동의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요즘 부쩍, 성인이 되고나서 누군가를 만나 서로를 마음에 들어하고,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자신과 타인의 결을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더 들뜨게 되는 이 친구와의 만남이다. 아무튼 이 파워J인 친구와의 약속은 또다른 계획들과도 함께 하는데, 우린 어쩌다보니 매번 서로에게 미션을 하나씩 주게 되었다. 저번 미션은 릴스/쇼츠 올리기였고, 이번 미션은 저번과 같은 미션에 영화 보기가 추가되었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한 것은 내가 <애프터 양>을 보게 된 배경을 늘어놓기 위해서, 그리고 요즘 내 일상을 이곳에 일기처럼 기록해두기 위해서다.




사실 우연히도, 이 영화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만남과 사랑과 삶, 기억이라고 말한다는 점(내 해석은 그렇다)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된 배경과 연장선 상에 있게 되었다. 우리가 인간이든 클론이든 사이버 사피엔스든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이,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누구와 만나는가, 우리가 그들을 만나며 무엇을 느끼는가로 의미지어진다고 보는 영화다. 사랑과 그리움, 기억처럼 말이다. 이것이 없다면 각자의 생에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이 있다면 그 존재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 <애프터 양>은 <매트릭스>, <터미네이터>, <토탈 리콜> 등 SF 철학 영화에서 숱하게 다룬 것처럼 존재에 대한 사려깊은 의문이 담겨 있는 영화다. 지금껏 우리는 영화 작품들을 거쳐오며 인격동일성의 문제, 통 속의 뇌 이론 등을 만나왔다. (내가 이 이론들을 왜 (어렴풋이) 알고있냐 하면 대학 시절 신상규 교수님의 ‘SF영화로 배우는 철학’ 강의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인기 많은 교양 강의였다.) 이 영화에서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의문을 감성적인 화면과 음성, 연출로 표현해내고있다. 미래 배경과 적당한 SF적 설정들이 들어가있지만 그속에 담담하고 절절한 감성을 담고있다는 점에서 <네버 렛 미 고>와 비슷한 톤앤매너를 갖고있는데, 해당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이 영화도 마음에 들었다.




연출에 있어 가장 감탄했던 부분은 같은 순간을 떠올리는데 제이크가 장치를 통해 양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과 본인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에 차이를 두는 연출이었다. 양이 저장한 기억들은 선명한 영상으로 기록되어있는 반면, 제이크의 기억은 대사가 반복되기도 하고 끊기기도 한다. 이렇게 사이버 사피엔스와 인간이 기억하는 방식의 차이점이 명백히 드러나긴 하지만, 우리가 그 기억의 조각들에서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진 않는다. 어쩌면 양의 감정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양이 무엇을 저장할지 선택한 행위의 근거가 사랑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걸 보면 말이다. 그 순간들을 저장해놓기로 한 그의 선택은 양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행위인 셈이었다. 그 모든 것들은 사랑이었고 이 사랑이 바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생명의 고귀함이었다.


한편, 흥미로운 SF 배경 덕에 생각해볼만한 대사들도 꽤 있었다. 그중 가장 좋았던 부분이다.



양 : “중국인들은 나비를 아주 좋아해요. 상심으로 죽고 나비로 환생한 연인에 관한 설화도 있어요. 고대 중국의 철학자 노자도 이렇게 말했죠. ‘애벌레에겐 끝이지만 나비에게는 시작이다.’ ”


카이라 : “멋지네. 마음에 들어.

너도 그 말을 믿어? 끝은 곧 시작이라는 말.”


양 : “애벌레한테는 그렇죠.”


카이라 : “다른 생명한테도 그런 것 같아?”


양 : “모르겠어요. 그런 믿음은 제 프로그램에 없거든요. 어떤 것 같으세요?”


카이라 : “그렇게 믿고 싶어.”


양 : “정말요?”


카이라 : “가끔 생각해보면 인간 프로그램에 그런 믿음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정말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어.”


양 : “솔직히 얘기해도 될까요?”


카이라 : “그럼 잠깐만, 솔직하지 않을 수도 있어?”


양 : “아닐걸요.”


카이라 : “얘기해봐.”


양 : “저는.. 괜찮아요. 끝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요.

저는 이렇게 프로그래밍됐나 봐요.”


카이라 : “그래서 슬픈 적도 있어?”


양 : “글쎄요. ‘무’가 없으면 ‘유’도 없으니까요.”



마지막 대사의 여운이 엄청나다. 곱씹어 생각해보게 만드는 대사다. 개인적으로 죽음에 대해 생전 처음으로 의문을 가졌을 때 받았던 묘한 공포와 우울감, 신비로움이 다시 피어오르기도 했다. 끝이 곧 시작일 거라고 믿도록 프로그래밍되어졌을지도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에 말이다.


다시 영화 속 양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와보겠다. 사랑을 하며 살았다면, 그는 존재했다. 끝이 나기 전에 그렇게 마음을 다해 존재했다면 그 어떤 이름의 존재만큼이나 행복하고 감동적인 생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양만큼의 생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살면서 만나는 많은 만남에 대해 진심을 다하고 있는지, 사랑하고 있는지 말이다. 마음은 촉촉해지고 생각은 확장되는 좋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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