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백석 평전> 을 읽고
시를 쓰고 싶었다. 짧아서 만만한 게 아니라,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보다 막연하고 단순해서 더 알아가는 게 좋았다. 직접 떠먹여 주는 것보다 상상하고 기대하며 그려보는 맛으로 시를 선호했다. 학교생활 강제로 전교생이 참석했던 백일장의 원고지는 서투른 내 시어로 가득했고 특별히 내 마음을 알아주는 선생님은 없었다. 괜찮았다. 나는 시를 썼으니까. 그리고 그 괜찮은 마음은 또 쌓여서 노랫말로 확장됐다. 현재 그 무엇보다 시를 닮은, 가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그쳤다.
편지를 쓰고 싶었다. 사람을 향한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는 말보다 글이 단단했다. 고민 없이 표현하더라도 말보다 글은 한 번 더 ‘뒤로가기’가 가능했다. 북북- 두 줄 긋더라도 그 줄로 드러나는 서투름이 더 매력적이었다. 축하와 격려, 감사와 사과는 편지가 제격이었다. 가끔은 노래나 시 같은 표현을 원했지만 그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내 마음을 나만의 압축파일로 줄였더라도 그 파일을 해제할 적절한 프로그램이 모두에게 보유되지 않았다.
백석을 선택한 건, 어쩌면 내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고- 시나 편지가 비롯된 마음과 비슷한 씨앗이다. 누군가의 흥미, 누군가의 찬양 또 누군가의 귓속말로 백석은 시작됐다. 한 생을 타인의 기록으로 만나는 건 또 다른 작품이었다. 실제 삶과 실제 백석과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사료로만 판단하고 추측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하염없이 의심했고 남게 된 건 결국 그의 시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들이 말하는 백석은 순수함, 외로움, 그리움과 괴로움, 고달픔과 밋밋한 기쁨이 혼재되어 있었다. 물론 읽는 나의 마음이 많이 반영됐다. 시란 필수적으로 그런 거니까. 감정선을 정리하다 보니 내 시를 읽고 쓰고 싶었다. 서투르게 휘갈겼던 몇 편의 시를 백석 이야기를 나누던 H님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몇 가지 표현에 감동받아했고, 그 감동에 또 시가 당겼다.
노랫말이 될 수도, 편지글이 될 수도, 몇몇 단어의 흩뿌림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시는.
시는 그렇게 되어간다. 그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건
뭉그러졌지만 맛있는, 먼지가 섞여 있지만 부드러운 내 시를 읽으러 ‘오는 이’다.
나는 그래서 백석을 선택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