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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깃글 Aug 01. 2024

뭐가 되는 냉장고

김기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읽고

하루에 세 시간 운동하고, 읽어야 할 책을 읽고, 디제잉 준비를 하다가 새벽에 잠이 들어도 괜찮은 내가, 집안일을 하다가 정신을 못 차리고 기절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문득 내 냉장고 이야기가 마지막에 살짝 끼워 넣을 단편의 단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당근, 당근, 당근당근, 점심시간이면 더 쉴 새 없이 알람이 울렸다. 냉장고 키워드 알람을 해두었다는 게 이렇게 소란스러운 일일 줄은. 29초 전에 올라온 매물을 클릭해 본다. ‘사용한 지 1년 되었지만, 이사를 해야 해서 팔아요, 15만 원, 캐리어 냉장고 150리터’ 모델을 네이버에 검색해 본다. 원가는 43만 원,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가격이지만 사용감이 덜 해서 흥미가 간다. 거래 장소는 역삼동. 내가 직접 운전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안고 친구에게 톡을 고민해 본다. 너, 차 모델이 코나였나? 고민하던 새, 해당 글은 예약 중으로 바뀌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부지런한 걸까. 조금 시무룩해진 마음을 밥숟가락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10일간 당근 어플을 들락날락했다. 생각보다 냉장고 키워드 알람에 제한을 많이 걸어야 했다. 대형, 상업, 업소, 20만 원 미만.. 조금 합리적인 금액이다 싶으면 예약은 1분 안에 찼고, 뒤늦게라도 말 건 나를 응대해 주는 사람들도 없었다. 나 분명히 누구보다 빨랐는데. 중고 거래 세계는 더 냉혹했다.

가끔 운전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현실과 이렇게까지 냉장고에 매몰되는 일상이 나를 점점 작아지게 했다. 그래 그냥 사자. 새것의 가격과 통장 잔고를 비교하다 더 비참해졌다. 냉장고가 뭐라고.


아니, 냉장고는 뭐 된다. 냉장고는 에어컨 다음으로 최고의 발명품이다. 탄산수가 먹고 싶어 24캔을 사 두고 먹지 못했다. 선물로 받은 냉동 과일 스무디가 녹아 잘 갈리지 않았다. 괜히 배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버티자. 찾자, 냉장고.


이 냉장고에는 사실 아는 사람들만 안다는 슬픈 사연이 있다. 이 오래된 냉장고는 고모가 선물 주고 내 자취생활을 책임지고 있었다. 수평도 맞지 않고, 수납공간이 정말 적었지만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아주 가-끔 냉장고가 꺼졌다가 켜졌고, 상상하지 못한 일이 종종 벌어졌다. 당시에는, 곧 결혼하고자 했던 누군가가 있었기에 그냥 그때 버려야지라고 다짐했다. 흠흠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냉장고를 받으러 간 곳은 공덕의 오래된 오피스텔. 매우 친절한 당근 거래자는 아버지뻘의 남성이었다. 생각보다 더 작은 여자가 왔다고 느끼셨는지, 엘리베이터까지 냉장고를 옮겨다 주셨다. 끙차끙차 하고 1층에서 끌어온 냉장고는 경비아저씨의 눈초리를 받고 다시 땡기는데 땀이 많이 났다. 그 모습을 보고 또 도와주는 다른 아저씨. 누군가의 친절을 받고, 다시 내 친구가 집으로 옮겨다 준 냉장고.


냉장고를 다 들이고, 바닥을 닦고 배치를 옮기면서 또 물건을 냅다 버렸다. 냉장고를 어떻게 청소하지? 유튜브를 찾아보고 영상을 몇 개 살펴보았다. 베이킹 소다와 과탄산 수소.. 식초와 소주.. 나에게 있는 건 소주. 이걸 휴지로 닦았나, 물티슈로 닦았나, 행주를 써야 하나.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소주로 소독하고, 남아있는 물건 정리를 하고, 버리고, 또 버렸다. 락스를 잘못 만졌는지 세 손가락 끝이 거칠거칠했다. 다시 냉장고에 넣을 수 있는 친구들을 넣었는데 받침대가 하나 더 남았다. 나는 그 받침대와 물건을 다시 빼내야 했다. 한 칸 한 칸 닦으며 음식과 물건의 소중함을 느꼈다. 고마워 멸치액젓아, 고마워 케찹아, 또 고마워 코코넛워터야. 냉장고와 함께 남겨주신 얼음통에 물을 채우고 문을 닫았다. 집안일 잘하는 사람을 만나야겠어.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아침에 다시 연 냉동실 문에 꽁꽁 얼어있던 얼음을 보고, 눈물이 났다. 냉장고는 이렇게 소중한 존재였다. 나 이제 맥주 마실 거야, 그릭요거트 살 거야, 닭가슴살 주문할 거야. 그동안 집에서 많은 것을 포기 하고 살았다는 사실에, 집에서 먹는 식단이 제한되었다는 사실이 과거로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그게 바로 소확행이네. 옆에 있던 동료가 말했다. 그리고 집안일 잘 하는 사람은 그만큼 예민하다는 대답도 함께. 그래, 알겠어 알겠다고.


밖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하고, 해야 할 일들과 역할에 충실하려고 하고, 정신없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내가 냉장고 하나를 일 년의 시간을 유예하고 바둥거리며 살았다. 골똘히 생각한다. 냉장고는 중요하다. 내 삶도, 나에게 주어진 많은 미션과 과제와 인연도. 그리고 냉장고 속 음식이 녹아가는 것보다 다른 일과 일정이 더 따뜻해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말이다,

냉장고는 정말 중요하다. 그 덕에 나는 지금 시원한 탄산음료와 함께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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