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를 읽고
물기가 빠진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지난번 똑같은 거리를 달릴 때와 확연하게 달라진 풀 또 밤구름. 어떡하냐, 여름 진짜 끝났나 보다. 러닝은 여전히 고되었지만 장소의 시간이 바뀌었다. 그 변화는 심박수를, 결심의 게으름을, 연락의 망설임을 뒤집기에 충분했다. 뛰기 참 좋은 날이다. 입 밖으로 나간 문장 전에 설렘이 찾아왔다. 습도에 지쳐버린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말을 했다, 어쩌면 나, 가을을 기다린 걸지도?
기다리지 않는다고 해서, 밀어낸다고 해서 계절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확실한 현상에 의지를 한 방울 떨어뜨리는 행위는 얼룩 하나 번지기도 힘이 부족할 뿐이다. 가을 휴식을 앞두고 상반기 내내 일에만 집중하고 산 사람에게도, 장맛비에 낯선 뭍으로 떠내려간 나무 한 그루에도, 냉장고에 붙어 있는 5년 전 유럽 마그넷에도 가을은 온다. 하지만 그 각각에게 같은 가을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 보이고, 그것은 이 희곡 속 화제의 요소, ‘고도’와 다를 게 없었다.
해가 짧아지는 것을 제외하고 뿌리가 뽑혀진 나무에게 가을은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고, 우뚝 서 있지 못하고 쓰러져 또 다른 벌레들의 거처가 된다.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보다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오래된 마그넷은 가을, 겨울보다 그 냉장고가 언제 고장 나는지 혹은 다른 여행을 언제 어떻게 다녀와 마그넷을 사오는지에 따라 위치가 바뀐다. 그때까지 어떤 계절이 어떤 모양으로 다가오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휴식을 앞둔 사람은 가을이 간절하다. 가끔 인간의 인지 능력이 시간은 선형적으로 흘러가고 우리는 앞과 뒤를 구분하며 과거를 뒤로, 미래를 앞으로 두고 향해 나아간다고 믿는 데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가 아니라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실제로 무지개는 7개 색이 아니고, 계절은 4가지의 이름이나 어떤 절기로도 잘라내지 못한다는 점과 같은 사실과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게 실제로는 어제와 오늘의 변화, 흐름을 인식하는 블라디미르에게만 의미 있다는 게 느껴진다. 포조, 럭키, 에스트라공, 소년에게는 고도는 아무렴 상관없다. 블라디미르는 에스트라공과 이전 이야기를 꺼내고, 투정부리고 가벼운 갈등을 일으키다가, 서로 위로하고 안아주는 행동에도 취하기 이르는데 결국은 서로를 절대 떠나지 않는다. 이들을 보며 안정적인 삶을 격하게 추구하지만 모든 게 빠르게 지겨워진다는 퇴사한 후배가 생각났다. 어쩌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분리된 두 사람이 아닌, 한 개인의 두 정체성이 아닐까. 삶은 표면적으로 고도라는 결과, 결말, 목적, 결실을 치열하게 기다리며 시간을 인식하고 또 다른 자아는 그것보다 내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걱정하고, 졸리우면 잠에 쉽게 들며, 꿈과 현실을 구분 짓지 않기도 하는 것. 나는 에스트라공이면서 블라디미르이며 가끔은 앞이 보이지 않거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누군가가 시키는 춤을 추는 사람일 수도 있다.
사실 난 가을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냥 가을이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과거의 더운 시기와 더 예전의 시원했던 그전의 가을과 비교를 지을 뿐이다. 하지만 기다리거나 기다리지 않거나 가을이다. 그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겨울이다. 즉, 고도가 지나가거나 사라지고, 또 다른 무언가가 나타나 그것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때 무엇이 되어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난 관객일지도, 또는 다른 친구들에게 이번 가을이 참으로 아름답고 좋았노라 회상하고 있는 낭만주의자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