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새로운 희망을 보다
트랜스포머 영화에 개연성이란 게 생기다
*본문은 <범블비>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십여 년 전 극장에서 본 <트랜스포머>가 주었던 충격을 아직 기억합니다. 만화로만 보아왔던 거대 로봇들의 전투를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완벽한 실사영화로 재현했습니다. 지금도 액션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후에 나온 속편들은 몸집만 가득 부풀린 알맹이 없는 영화로 남았습니다. 기자와 평론가가 점점 떨어지는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퀄리티를 비판하자 마이클 베이는 "나는 십 대 소년을 위한 영화를 만든다. 그게 무슨 죄라도 되냐"라고 답했습니다. 자신은 로봇과 자동차, 미녀가 나오는 현란한 액션물로 '소년'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감독이라는 주장에서 그가 연출에 임하는 자세가 드러납니다. 좋은 액션을 만드는데 집중한다는 이유로 '스토리'는 무시해도 된다는 변명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완급조절에 실패한 과잉 액션과 편의에 따라 끼워 맞춘 무리한 설정은 전체 시리즈를 아우르는 이야기의 개연성과 통일성을 해쳤고, 1편에서 선보인 혁명적인 그래픽은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어지럽고 식상한 장면의 반복이 되었습니다. 최고의 블록버스터였던 <트랜스포머>는 속편이 나올수록 이야기를 즐기는 영화가 아니라 눈만 황홀한 놀이공원의 경험에 가까워집니다.
2018년 작 <범블비>는 위에 서술한 마이클 베이의 철학과는 반대되는 조금 더 '영리한' 선택을 합니다. 감독 트레버스 나이트와 작가 크리스티나 호드슨은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고 드라마와 액션, 두 영역에서 뛰어난 완성도를 이뤘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열여덟 살 소녀 '찰리'입니다. 영화는 찰리의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많은 공을 들입니다. 사고로 아빠를 잃은 찰리는 집에서는 겉도는 아웃사이더이며 또래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놀림을 받습니다. 자신을 제외한 엄마, 새아빠, 남동생의 모습은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의 표본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가족과는 점점 멀어지고 아빠와 함께 했던 클래식 자동차를 복원하는 일에 매달립니다.
범블비는 사이버트론 행성에서 전투를 치르던 중 임무를 받고 지구에 도착하지만 디셉티콘의 공격을 받아 기억과 목소리를 잃은 채 겨우 살아남아 구식 비틀의 모습을 취하게 됩니다. 첫 차를 원했던 찰리는 폐차장에서 비틀로 변한 범블비를 만납니다. 공짜로 얻은 낡고 노란 비틀이 보통 자동차가 아닌 지능을 가진 로봇이라는 걸 알게 된 찰리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범블비를 세상의 눈으로부터 숨기고 보호하게 됩니다.
찰리와 범블비의 만남은 여러모로 스필버그의 <E.T.>를 연상시킵니다. 본인도 부모가 이혼한 가정에서 자란 스필버그는 한부모 가정의 이야기를 영화 속 주제와 함께 녹여내기로 유명합니다. <E.T.>는 외계인 친구를 구해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는 소년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가족 구성원을 더욱 끈끈하게 이어주는 마음씨 따뜻한 외계인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범블비에게 주어진 임무는 디셉티콘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고 사이버트론을 재건할 발판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와 맞닿은 진짜 역할은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소녀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일입니다. 범블비를 돌보면서 찰리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성장합니다. 범블비와의 만남은 그녀가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새로운 가족과 친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습니다.
마이클 베이의 포커스는 오로지 액션과 멋들어진 폭발이었고 그로 인해 인간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단순했습니다. 많은 호평을 받은 1편에서는 인간 캐릭터들이 개연성 있게 등장합니다. 주연인 샤이아 라보프는 십 대 소년의 고민과 범블비와의 우정을 공감이 가는 연기로 잘 풀어 나갔습니다. 메간 폭스도 다혈질 메카닉으로 나오면서 영화 사상 가장 인기 있는 여주인공으로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감독의 포커스는 쉴 새 없이 폭탄이 터지는 화려한 액션이었고 그 틈바구니에 매력 있는 인간 캐릭터를 연출하는데 실패합니다. 억지로 설정을 짜 맞추면서 어떻게든 인간 주인공을 집어넣으려고 하니 속편이 나올 때마다 전작의 설정을 파괴하게 되고 어째서 불필요한 인물들이 로봇보다 많이 나오냐는 비판도 일었습니다.
게다가 미 국방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작품이라 미군의 위용을 뽐내는 장면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옵니다. 트랜스포머도 강하지만 '우리 미군도 대등한 위치에서 싸운다'라며 대놓고 막강한 화력과 최신 무기를 자랑하는 홍보 영상을 찍어댑니다. 결국엔 사이버트론의 로봇 전사들만큼 강력한 미군의 프로파간다가 되었습니다. 미군이 오토봇과 전투를 함께하며 맹활약을 하는 것이 마치 하스브로의 또 다른 장난감 시리즈 <지. 아이 조>의 액션 피규어 같습니다. 이럴 거면 굳이 오토봇이 나설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결국 1편의 핵심 주제 중 하나였던 소년과 로봇의 우정은 액션과 눈요기에만 치중한 곁가지 장면들 때문에 의미가 퇴색됩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할애할 바에는 극을 이끌어가는 인간 주인공에게 더욱 몰입도 있는 개연성과 드라마를 부여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범블비>에서 군과 주요 조연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초반 주인공을 위협하는 악역(이라기보다는 대립자)으로 설정된 존 시나가 연기한 '번즈 요원'은 범블비를 추적하고 궁지에 몰아 넣습니다. 영화 전체의 맥락과 후반 전개를 보면 단순한 악역이 아닌 군인으로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서도 주어진 상황과 판단에 근거해 명령을 거스르는 선택을 내리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 영화는 전작의 클리셰도 벗어나면서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클리셰 또한 살짝 비틉니다. 많은 SF 영화 설정 중 미지의 생물체와의 접촉이나 세계를 위협하는 재난 상황에서 군과 관료는 과학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깽판을 치는 악당으로 묘사됩니다. 이성의 목소리를 권력으로 누르고 힘을 맹신하고 밀어붙이다 지구를 위기에 몰아넣습니다. 이런 유형의 설정은 <투모로우>, <고질라>, <쥬라기 공원>, 2016년 작 <컨택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범블비>에서 모두를 위기에 몰아넣는 선택을 내리는 것은 야망에 찬 과학자입니다. 외계생물과의 첫 번째 접촉이라는 기회에 눈이 멀어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죠. 이런 디테일을 보며 제작진이 스토리 구성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작진은 드라마의 완성도에 많은 신경을 썼지만 액션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감독이 바뀐 만큼 마이클 베이 시절의 대규모 폭발과 시가지 전투보다는 스케일이 훨씬 작아졌습니다. 실제로 이전 시리즈보다 더 적은 제작비가 투자되었죠. 하지만 <범블비>가 마이클 베이 시절보다 물량이 작아졌다는 것이지, 최근에 나온 다른 블록버스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크고 화려한 액션을 선보입니다. <트랜스포머>라는 이름값을 충분히 하는 영화입니다.
또 다른 감상 포인트는 원작 애니메이션의 느낌을 되살린 로봇 디자인입니다. <트랜스포머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 디자인은 원작이 만들어졌던 80년대 당시의 감성을 잘 보여줍니다. 21세기에 만들어진 영화에서는 모든 로봇들이 세련되고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으로 재탄생합니다. 깔끔하고 현대적인 변신 장면은 환호성을 받았지만 이후에 나온 많은 디자인은 자동차에서 변신하는 로봇이라는 원작 설정과 많이 동떨어졌습니다. 기괴하고 무서운 살인 기계의 모습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갑옷 같은 모습을 부각했습니다. 87년도를 배경으로 하는 <범블비>는 원작의 감성을 재현한 디자인을 보여줍니다. <트랜스포머 애니메이션> 팬이라면 좋아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영화와 음악 등 당시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레퍼런스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범블비>는 액션과 드라마 양 쪽에서 관객을 만족시키는 작품입니다. 마이클 베이 시절의 아쉬웠던 스토리 전개를 세련되고 사려 깊은 드라마로 풀어내고, 시원하고 통쾌한 액션은 멋들어지게 전승합니다. 영화가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프리퀄인지 리부트인지에 대해서 팬들의 의견이 분분하고 제작사도 공식적인 설정을 표하지 않았는데요, 차라리 이 영화를 토대로 시리즈의 리부트를 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