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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Feb 06. 2020

돈 벌어도, 주부가 있어도 집안일은 셀프입니다.

"10억 벌어도 양말은 직접 치우시오."  




주부는 가사 분담을 바라면 안 된다고? 



블로그에 쓴 글이 네이버 메인에 노출됐다. 집안일이라는 다분히 진부한 주제였으나 댓글이 하루 만에 백 개 넘게 달릴 만큼 뜨거웠다. 공감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장문의 반박 글도 반이 넘었다. 글은 어느 커뮤니티로 공유됐다. 


"감히 전업주부가 분담을 논하다니. 집안일 당연히 100% 해야지. 하기 싫으면 돈 벌어 와."      


게시판은 집안일을 감히 배우자와 나누려는 주부에 대한 적의로 들끓었다. 살의가 담긴 욕설도 있었다. 그들이 실제로 결혼 했는지 어린 아이를 키우는지, 육아에 하루 얼마나 참여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사자의 결혼, 자녀 유무 무관하게 어떤 이들에게 주부의 가사 전담은 천하의 도리이자 의무였다.      


익명의 사람들이 내지르는 혐오의 말에 관심 주지 않고 담담하려 해도 마음에 스크래치가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무시하라고도 하지만 쉽사리 외면하긴 어려운 이유는 그런 의무가 한 때 나를 부단히도 괴롭히던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댓글을 읽을 때마다 남편에게 설거지 하라고 고함치던 내 모습, 그런 나를 빤하게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악몽처럼 기억난다. 첫 책을 내고 강연 다니며 만났던 엄마들의 지친 목소리가 떠오른다. 나의 블로그에 가끔 남겨지는 길고 긴 비공개 댓글도 생각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남편이 벗어던져둔 옷을 치우며 한숨을 내뱉지만 싸우기에도 이미 지쳐버린 이야기들이 엮어진다. 내 안에 아직 남은 갈등의 잔재는 다른 이의 하소연을 두고 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기어이 글을 다시 쓰고 만다.      






여자와 살았을 땐 생기지 않던 문제
 

집안일에 관한 글을 쓰다보면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 못 보는 청소 결벽증에 걸린 사람처럼 느껴지는 부담이 생긴다. 지나치게 깔끔하니까 집안일로 스트레스 받는 거 아니냐는 핀잔을 들을 때도 있다. 억울한 소리다.      

나는 스무 살 이후로 부모님과 떨어졌다. 회사에 취업하기 전까지 대학의 기숙사나  학교 앞 원룸촌에 살면서 매 학기, 또 방학 마다 룸메이트를 바꿔야 했다. 같이 살아온 이들만 스무 명이 넘는다.     


기억컨대 누군가와 살면서 상대가 물건을 아무데나 둔다거나 밥을 먹고 그릇을 치우지 않는다거나 과자 봉지나 코를 푼 휴지를 바닥에 버려서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었다.      


우리가 살던 작은 방이란 잠만 자는 거처에 불과했기에 먹고 치우는 일이 애초에 적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같이 살던 친구들과 내가 비슷한 정도의 청결도를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  


어쨌든 여자들과 지낼 땐 누가 누구를 챙겨줘야 한다는 의무 같은 건 없었고 나는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사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깔끔 떨지 않는 무던한 동거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결혼 하고 아기를 낳자 나의 위치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수평적이며 동등한 공동생활의 구성원 한 명이 아닌 집안의 돌봄 전체를 떠맡는 역할이 절로 나에게 기울었다.      



나의 정체성은 전업주부가 아니라 주양육자였다.  


집에 있다 할지라도 나의 정체성은 전업주부라기보다는 주양육자에 가까웠다. 내가 집에 있었던 이유는 배우자가 밤까지 직장에 있는 동안, 나 아니면 아무도 볼 수 없는 천둥벌거숭이를 돌보기 위해서였지 배우자에게 아침상을 차려주고 싶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아이에게 줄 이유식을 위해 최소한의 요리를 했고 쌓여가는 빨래를 했다. 재우고 놀아주고 씻겼다. 


누군가는 집안일은 더 더러운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라고도 한다. 음식물 쓰레기에 굼뱅이가 생겨도 모른 척 할만큼 불결함에 내성이 강한 나였건만 집에 있는 주부에게 부여되는 관습의 압력은 거셌다. 못 씻고 못 먹었지만 그럼에도 틈틈이 집을 치워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바깥일로 지친 남편을 방치해서도 안 되었다.      


뼈에 인이 박힐 정도로 어릴 적부터 들어온 ‘여자는 살림을 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여자들과 살 땐 발동하지 않다가 남자와 살 때에야 비로소 작동했다. 여자와 살 때는 그 누구도 같이 사는 친구가 야근하면 야식을 챙겨놓고, 그의 옷을 챙겨주고 아침 먹을거리를 식탁 위에 올려두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남자와 살 땐 사방에서 그런 명령을 받았다.


문득 문득 올라오는 억울함은 무시해야 했다. 아내, 여자라는 위치에서 내가 갖는 반발심은 배려나 이해심이 없는 이기심으로 둔갑했기 때문에.           





 ‘육아는 같이. 집안일을 주부가’라는 말의
이상함    



육아하면서 집안일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도, 본 경험도 없어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보면 이런 구호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육아는 같이집안일을 주부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집에 있기를 선택한 주양육자를 바로 전업주부로 일치시켜버리는 등식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는 알 수 없다. 


육아는 ‘같이’ 한다는 말의 사례들을 살펴보자니, 아이와 놀아는 주더라도 아이를 살아있게 하는 먹이기, 재우기 등은 제외하고 있었다. 똥 묻은 엉덩이 씻어주기나 바닥의 부스러기 닦아내기 장난감 정리하기도 집안일로 제외시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또 그 집안일에는 바깥에서 돈 버는 자들은 집에 오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을 정도로 지쳐 있으므로 ‘아이를 두 눈으로 살피는 일 이외에’는 돈을 벌지 않는 주부가 손과 발이 되어 그림자처럼 부양자를 보살펴줌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집안일은 주부’라는 완고한 전제 속에 ‘셀프’로 해야 할 부분까지 주부가 해야 할 집안일로 얼렁뚱땅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아이와 놀아주는 분담은 호의로써 해도 되지만 수저를 놓거나 빨래를 개어서는 큰 일 나는 거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집안일의 고통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공동업무와 셀프 케어는 다르다. 



함께 사는데 필요한 공동의 업무와 스스로 해야 할 셀프의 영역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내들은 반복해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자꾸만 더러워지는 바닥을 청소기를 미는 일 이상으로 반찬 투정하거나, 허물 벗듯이 옷을 두거나, 라면 끓여먹고 스프를 사방에 뿌려놓거나, 말하지 않으면 씻지도, 이발조차 하지 않는 남편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아침 차려주었느냐, 남편 저녁 반찬을 만들었느냐, 홀아비처럼 보이지 않게 옷은 잘 갖춰 주느냐고 집요하게 확인하는 주변 사람들의 압력에 고통 받고 있었다.      


철이 바뀌면 서랍장의 옷을 바꾸고, 다 입은 옷은 세탁하고, 속옷과 양말이 떨어지면 구입하고, 건조대에 옷이 널어져 있으면 가져다 입고, 아침에 식구들과 식사 시간이 맞지 않으면 스스로 꺼내서 차려 먹고, 먹고 난 자리는 치우는 건 애초에 집안일이라고 할 수 조차 없는 생활 습관이자 자기 관리의 영역이다.  


하지만 스스로 해야 할 돌봄은 너무나도 쉽게 집안일로 둔갑하며, 집에 있는 사람, 즉 주부라 부르고 싶은 사람에게 ‘뒤치다꺼리’로 전가된다. 많은 주부들의 집안일 호소는 이러한 뒤치다꺼리 속에서 하녀가 된 듯한 자존감 , 아니 존엄의 하락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전업주부들에게 가정의 우아한 관리자라거나 집안의 CEO라는 권한을 그럴듯하게 부여하는 이들도 있지만 뒤집어 까진 양말을 주워 담으며 내가 집안의 총책임자며 집안일을 독점하고 있고, 식구들을 살려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주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건 살림이 인간사에 얼마나 중대하고 숭고한 일인지와는 하등 관계없으며 청소라는 행위가 주는 보람과도 상관 없다. 






자기 할 일은 스스로 하는 부부



나는 주변에서 아무리 뭐라 한들 남편을 돌보지 않기로 했다. 내가 집에 더 오래 있는 이유는 남편이 볼 수 없는 시간에 아이를 보기 위해서지 남편 수발을 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내가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은 건조대에 걸린 자신의 옷을 개서 서랍장에 착착 넣어둔다. 내가 입을 팬티를 남편에게 사달라고 하지 않듯이 남편도 양말이 구멍 나면 마트 갈 때 잊지 않고 산다. 물을 마시고 나면 컵을 씻어둔다. 음식을 요리하고 나면 렌지 주변을 닦고 먹고 나면 설거지를 한다. 샤워를 하고 나면 욕실의 머리카락을 정리한다. 자고 일어나면 이불을 갠다.      


우리 부부는 각자 흔적을 만들어내는 부분, 자신에게 필요한 일들은 직접 처리한다. 그것들은 일차적으로 나의 생존을 위해 존재하고 우린 그걸 해낼 신체적 능력이 있으니까. 그리고 아이를 보는 일, 함께 집안을 관리해야 하는 일은 나눈다. 


그러다보니 집안일이라고 뭉뚱그려진 채 쏟아지던 뒤치다꺼리들이 현저하게 줄었다.  우리가 집안일 가지고 겪는 갈등은 공과금 납부, 욕실, 현관과 같은 공용 공간 청소, 아이 육아 용품 구입, 아이가 아플 때 시간 내기 등, 공동의 영역에서 누가 무엇을 맡느냐, 누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수행하느냐에 있지, 내가 남편을 얼마나 챙겨주느냐 아니냐, 어질러진 물건을 누가 치우느냐가 아니게 되었다.      




돈을 얼마를 벌건 돌봄은 스스로 하자  



남자들이 애와 같아서 못한다고도 한다. 그래서 아이와 같이 신체적 지능적 능력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는 걸까. 건강한 성인의 자기 돌봄 거부는 ‘못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걸 하면 자신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믿는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에 기인하고, 집안일에 대한 천시에서 비롯된다. 사소하고 하찮게 취급해서다.      


자기 돌봄 면제는 남편에 대한 배려라고도 할 수 없다. 아이라 해도 스스로 할 일을 부모가 대신해줄 때 자립심을 꺾는다고 나무라는데, 어째서 남편이 할 일을 아내가 해주는 걸 ‘사랑’이고 ‘이해’라고 정당화시킬까.      


또한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헌신이라면 왜 여자들은 누리지 못할까. 남자들은 주부가 되어도 이런 돌봄을 인수인계 받지 않는다.  돈을 더 번다는 이유로, 집에 있는 시간이 적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시중을 받을 수 있다는 권리는 그 사람이 남자일 때만 주로 생겨난다.           


자기 돌봄은 돈을 얼마를 벌건, 또 얼마나 오래 일하느냐와도 상관 없다. 돈을 번다는 이유로 하고 싶지 않다면, 혼자 살면서 돈을 주고 하인을 고용하기를 추천한다. 도우미로는 부족할 것이다. 가사 관리사도 당신의 양말을 골라주진 않으니까.      


집안일을 주부가 맡아야 한다 어쩐다 하는 논쟁은 그래서 이 점을 우선 집고 넘어가야 한다. 주부가 맡아야하는 집안일이라는 건 어디서부터 어디냐고. 스스로 해야 할 자기 간수, 같이 낳았으므로 같이 키워야 할 아이 양육까지 집안일로 떠넘기는 건 아닌지 말이다.  돌봄은 셀프다.                     





*책엔 수정된 내용으로 실려 있습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1117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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