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혼여성들이 남편을 부르는 호칭, 그 불평등함에 대해
카페 한쪽에 앉아 노트북 켜고 글 쓰던 토요일 오후. 뒤쪽 테이블 에 앉아 있던 4-50대 여성 네 명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하게 됐다. 엿들을 의도는 아니었는데 특정 단어를 한 번 듣고 나니 유독 그 말만 또렷하게 들렸다.
“어제 우리 오빠 생일이었잖아.”
“신랑 밥은 해주고 나왔어?”
“우리 신랑이 애 보고 있어.”
웅얼거리는 실내 소음 때문에 전후 사정과 맥락은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내 귀에 지속적으로 들어온 낱말은 자신의 배우자를 일컫는 ‘신랑’ 또는 ‘오빠’라는 호칭이었다.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공기처럼 듣고 써왔던 말이 미묘한 냄새처럼 신경에 거슬리게 된 계기는 엄마 페미니즘 탐구 모임 ‘부너미’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결혼식 올리고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왜 ‘신랑’이라고 부르 는거죠?”
우리는 기혼여성이 겪는 가족 내 성차별을 지속적으로 다루어왔다. ‘부너미’의 레이더망은 아무리 사소한 행동, 태도, 말이라고 해도 사정 봐주지 않고 예리하게 감지했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문제 제기 덕에 나 역시 ‘신랑’이라는 호칭을 낯설게 체감했다. 마땅하지 않다 느끼면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무심결에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내들만 애타게 '신랑'을 찾는다
결혼을 준비하거나 결혼식을 막 올린 부부를 일컫는 말, 신랑,신부. 그러나 많은 여성들은 신혼이 지나고 아이들이 크고 중년이 한참 넘도록 자신의 남편을 신랑이라고 부른다. 나는 남편을 신랑 으로 부를 만큼의 설렘이나 애틋함이 남아 있지 않아서인지 그 호칭이 입에 붙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들이 말할 때 딱히 거슬림을느끼지도 않았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반대의 경우에 대입해보니 기혼여성들이 자주 쓰는 신랑이라는 호칭은 너무나 기이했다.
초등학생 아이를 둔 남자 동료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보자.
“오늘 신부가 아이를 데리고 온다고 해서요.”
초등학생 아이를 둔 여자 동료가 이런 말을 남긴다면 어떤가.
“오늘 신랑이 아이를 데리고 온다고 해서요.”
어감의 차이가 현저하게 느껴진다. 분명 신랑과 신부는 같은 상황에서 남성과 여성을 일컫는 수평적인 호칭인데 쓰임새가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신랑이라는 말은 어색한 거부감 없이 읽히고, 신부라는 단어는 어법이 잘못된 문장처럼 느껴진다. 존칭어가 극도로 발달한 한국어에서 호칭은 관계의 역학을 정의해주는 중요한요소다. 상호 간에 위계가 없다면 호칭 또한 상호 수평적이며 동일한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 높임말이면 같이 높이고 낮춤말이면 같이 낮춰야 한다. 적용 대상도 같아야 한다. 그러나 여자가 배우자를 향해 쓰는 호칭과 남자가 쓰는 호칭의 균형은 비틀려 있다.
‘당신을 평생도록 결혼식 때의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살겠어요’라는 매 순간 다짐인 걸까. 배우자를 그리도 살갑게 여긴다면남자 또한 자신의 아내를 일컬어 ‘신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공적인 자리는 물론 동료나 친구들 앞에서. 그러나 한국의 남편들은 제삼자에게 ‘아내’ 또는 ‘처’, ‘부인’이라는 말조차 못 꺼내서 ‘와이프’, 또는 ‘마누라’라고 부르는 지경 아닌가. 이런 와중에 아내들만 결혼식의 풋풋함을 가득 새긴 신랑을 애타게 찾고 있다. 여기에까지 이르니 신랑이라 부르는 말을 들을 때마다 뜨끔뜨끔했다. 그렇다고 섣불리 나서서 호칭을 고쳐주면 상대방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으니 속으로만 ‘신랑, 아니야. 아니라고요!’라고 중얼거린다.
'오빠'라는 호칭은 문제 없습니까?
신랑이라는 호칭의 문제점은 ‘부너미’ 모임에서 쉽게 동의했다.그러나 의외의 장벽에 다시 부딪혔다. 남편을 일컫는 또 다른 말,‘오빠’였다.
“‘오빠’라는 호칭은 어떻게 생각해요? 저는 좀 아니라고 보거든요.”
“왜요? 연애할 때부터 오빠였고, 오빠라는 말이 익숙해서 계속부르는 건데요?”
나름 성 평등주의자들인데 ‘오빠’라는 말이 성차별적인 호칭이라는 말에 다들 반발했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오빠’라는 호칭부터 버린 나는, 따지자면 ‘반反 오빠파’였다. 공식적인 부부가 되었으니 호칭을 새롭게 설정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아무래도 지인이나 친척들 앞에서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여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큰 문제라곤 여기지 않았다. 각자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나보다 10개월 먼저 태어났고 연도로는 고작 1년 차가난다. 우리가 막 데이트를 시작했을 때 남편은 나를 “나리 씨”라고 불렀고 나는 아마도 “저기요”였던 거 같다. 남편이 먼저 말을 놓자며 제안했고 자기를 편하게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다. 내가 그를 ‘오빠’라고 불러주고 말을 놓는다는 건 ‘친근한’ 남성으로 대한다는 의미였고, 비로소 그도 나를 자기보다 무려 10개월이나 어린 연하의 여성으로서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나리야” 라고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친해졌는가. 가까워짐은 맞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그건 일종의 서열 정리였다. 우리 사회는 친목을 맺을 때 나이를 우선 확인한다. 나이 차가 나는데도 존칭을 한다는 건 거리를 두고 예의를 차리는 사이라는 말이다. 우린 이 긴장을 없애기 위해 연장자가 말을 놓는다. 서열을 정리함이 친근함의 표식인 거다.
남편은 연상의 아내를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다
여기에 상대 성별이 달라지면 존칭은 좀 더 미묘한 뉘앙스를 띤다. 특히 ‘오빠’는 단순히 남자 연장자에게 쓰는 호칭만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20대에 학교나 동호회, 단체 등에서 알게 된 남자들은 조금 친분이 쌓이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자신을 ‘오빠가~’라고 슬금슬금 자칭하곤 했다. 느끼하게 내뱉는 말에 토가 쏠리는 것 같았지만, 내가 오히려 그들을 사람이 아닌 남자로 대하는 과대 반응은 아닐까 싶어서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면 눈 딱 감고 넘어갔다. 그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어떤 남자들에게 향하는 ‘오빠’ 는 ‘언니’와 비슷한 무성적 어감으로 남기도 했다.
하지만 오빠는 여전히 불온한 함의를 지닌다. 이 호칭에 갇히면 두 사람의 위치는 사회가 규정한 성별 위계에 포획된다. 여자가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는 한, 여자는 남자보다 사회적 위치에서도 서열에서도 능력에서도 자율성에서도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다. 오빠라는 말은 여자를 남자가 보호해줄 여동생으로 환원해버린다.
친족 관계를 떠난 ‘오빠’라는 말이 얼마나 이상한지는 동급인 ‘누나’의 쓰임으로 알 수 있다. 남자들은 연상의 여자와 이성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누나’라는 말부터 뗀다. 가수 이승기가 부르는 노래 ‘누난 내 여자니까’의 가사는 결국 ‘너라고 부를게’로 끝난다.
‘누나’는 가족 중 연장자를 향한 말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연장자에게 그만한 서열 권력이 주어지게 되는데, 로맨스로 진입하기 위해 서는 여성에게 그런 힘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결혼하고서도 마찬가지다. 연상의 아내를 ‘누나’라고 부르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누나라고 부를 땐 오히려 아내에 대한 존중을 하지 않을 때나, 무시하거나 놀리고 싶을 때다.
그보다 못하고 싶다. 그보다 낮아지고 싶다.
오빠라고 부르면서!
내가 데이트를 시작하며 ‘오빠’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건 어떤 이유였을까. 내가 만난 당시의 남편은, 통상적인 남성다움과는 꽤 거리가 있는 소심하고 내향적인 남자였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외향적이며 추진력이 있는 나는, 가뜩이나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마당에 언제든 그를 리드하거나 넘어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를 향한 ‘오빠’라는 호칭은 내가 그를 연장자로서 대우해주고 성별 긴장감을 유지하는 장치였다. 그러니까 그와 내가 차마 동등해지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우리 사이를 주도할 힘이 나에게 오지 않길 바란 것이다. 로맨스를 위해.
남자들이 로맨스를 위해 ‘누나’를 버린다면, 여자는 남자와 로맨스를 위해 ‘오빠’를 받아들인다. 남성에게 나이에 따른 권력을 주고 그만한 힘을 행사하게 하며 존중을 유지한다. 단지 ‘사장님’,‘선배’, ‘과장님’과 같은 딱딱한 권위가 아니라 ‘오빠’라는, 얼핏 느끼기엔 다정한 말로 권력을 ‘낭만화’한다. 친근함의 외피만 썼을 뿐이지, 위계와 서열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당시엔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익숙한 통념에 따랐다.
결혼하고서도 여자가 남자를 ‘오빠’로 부르는 건 여전히 서열상 아래에 있다는 재확인에 다름 아니다. 부부 사이에 이런 식의 위계는 과연 옳은가. 나를 포함한 3-40대 대부분은 부부를 상하 관계로도 나이에 따른 권력이나 역할을 분배하는 관계로도 보지 않는다. 파트너, 동료, 동반자로 인식한다. 그러나 ‘오빠’라는 말은 아내를 파트너나 동료라는 자리에서 지운다. ‘여동생’과 같이 오빠의휘하에서 보호하거나 지켜줘야 하는 위치로 내려가게 한다.
서로에게 편하면 그만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이건 어떤가. 요즘 가족 내 호칭 성차별 문제가 거론된다. ‘시댁’은 ‘시가’로 바꾸고 ‘도련님’이나 ‘아가씨’, ‘장인어른’, ‘장모님’ 등의 호칭 역시 수정하자는 논의가 한창이다. 그런데 왜 ‘오빠’는 유지하려 하는가? 왜 ‘오빠’라는 말을 쓰지 말라 하는 것에 저항감을 보이는가.
익숙함을 버리는 건 불편한 일이다. 두 사람간의 친밀성을 해치는 위협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이 편하다면, 오빠라는 호칭을 버릴 수가 없다면 그만큼 불평등에 안락하고 깊숙이 담가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 삶의 불평등은 공기 같아서 일부러 낯설게 보려 하지 않으면 감지되지 않는다.
'누구야'에서 '여보'로, 더 나아가 '누구씨'로
결혼하고서 남편을 ‘여보’라고 불렀다. 남편에게도 나를 ‘여보’로 불러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야’ 자를 떼지 못하고 ‘여보야’라고 불렀다. 이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닭살이라며 귀엽다고 반색했지만 나는 거북스러웠다. 애칭 같은 걸 만들지 못하는 나의 건조한 성격 탓인가 했는데 그 이유를 나중에야 파악했다.
‘야’라는,하대를 뜻하는 호격조사 때문이었다. 나는 ‘여보’인데 그는 ‘여보’라고 하지 않고 ‘야’를 붙인데서 벌어진 미묘한 위계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조사가 그가 나를 똑같이 존중해주지 않고 있다고 느끼게 했다. 한국어가 이렇게 까다롭다.
남편에게 나를 마찬가지로 ‘여보’로 불러주기를 요청했다. ‘여보야’, ‘나리야’는 금지어다. 그는 노력하겠다고 했고 호칭을 바꿨다. ‘부너미’ 멤버 중 한 분은 “오빠”와 “누구야”에서 “누구 씨”라는 호칭을 쓰기로 했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끝에 자리 잡았다고 했다. 호칭만 바꾸었을 뿐인데 남편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누구 씨’라고 부르면 상대방을 훨씬 존중하게 된다.
다른 이의 변화가 안주하고 싶은 나를 자극한다. 나도 입에 붙지 않아도 애써 쓰려고 노력했다. 남편을 ‘누구 씨’라고 어색함 없이 부르는 데 이르렀다. 부부 사이가 너무 서먹해지지 않느냐고? 우리가 불평등을 편안히 여겨온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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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여자, 아내, 엄마 지금 트러블을 일으키다> 에 실린 글입니다.
나는 묻고 싶다. “왜 그래야 하는데?”
무언가를 ‘어떻게 할지’, ‘잘할지’가 아니라 ‘그만두기’, ‘더 하지 않기’를 쓰고 싶다.
기혼여성들에게 요구되는 감정 노동, 가사 노동, 꾸밈 노동, 시간 관리 노동과 같은 추가 노동을 거부해가면서 자기 본위의 삶, 나만의 생활양식을 찾아가는 이야기.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1117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