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탈브라' 했다. 가슴둘레 전체를 밴드로 조이던 브라 러닝, 노와이어 브래지어, 면으로 되어 있던 브라렛까지도 쓰레기봉투에 던져버렸다.
내 가슴은 어떤 압박도 받지 않은 채 시원한 바람을 솔솔 만끽했다. 두꺼운 옷으로, 조끼로, 무늬가 잔뜩 그려진 티셔츠로도 가리지 않았다. 얇고 시원한 반팔 티셔츠 하나만 맨살에 입었다. 어떤 거리낌 없이 팔을 올리고 어깨를 쭉쭉 폈다. 40년 가까이 살면서 비로소 처음 느낀 가슴의 해방.
그러니까 남자들은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다는 걸까. 너무 낯선 감각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브래지어와 러닝셔츠는 필수라고 배워왔다. 그것을 입지 않으면 긴장감에 배가 살살 아파 오는 증상까지 나타날 지경이었다.
여성의 숙명처럼 여기며 억지로 입어온 세월이 억울했다. 가슴을 압박하는 브래지어가 가렵고 답답해 긁었다가 풀었다가 하고, 내 몸에 맞는 브라를 찾기 위해 검색하고, 새로운 걸 샀다가 맞지 않아 버리기를 반복해온 시간에 다른 일을 했더라면. 아니다. 지금이라도 브래지어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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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거리낌 없을 수 있던 건 ‘노브라 티셔츠.’ 덕분이다. 일상의 필수품이다. 브래지어 없이도 유두를 가릴 수 있도록, 가슴 곡률에 맞춘 얇은 패드가 내장된 옷이다. 나는 이 옷을 활동하던 협동조합 멤버들과 함께 개발했다.
평소 옷 제작은 물론이거니와 패션에도 관심 없던 멤버들이었다. 멀어도 한 참 멀었다. 우린 글을 쓰고 전자책을 출판하고 강연을 기획하던 일종의 취미 공동체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제조업에 뛰어 들어 티셔츠, 그것도 기능성 의류를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사건은 사상 최악의 폭염이 휩쓸었던 2018년 여름으로 되돌아간다. 주말, 조합 월례회의에 모인 여섯 명의 멤버들은 회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 있었다. 진 빠지는 더위에 다들 어찌 사는지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최근 뉴스에서 자주 언급되던 ‘연예인들의 노브라’ 이슈로 화제가 흘렀다. 감히 시도 하지 못하지만 누구나 공감하는 지점이 있었다.
"브라 차는 게 제일 싫어요."
"나는 반창고 붙이고 다녀요."
"여름 옷은 얇아서 노브라도 못해."
나는 이때다 싶어 의기양양 말을 꺼냈다. “저는 노브라로 다닐 방법을 찾았어요.” 조잡하기 이를 데 없던 나만의 수공예 노브라티셔츠를 자랑했다. 조합원들을 그게 가능하냐며 애써 상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때 누군가 던졌다.
"이거 다음 프로젝트로 진행하면 어때요?"
이 공동체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서로 잠시 얼굴을 씩 보며 웃다가 답했다.
“한번 해보죠! 안 되면 말고”
다음 회의 때는 각자의 노브라티를 직접 만들어보며 가능성을 타진해보기로 했다. 웬 가사 시간이냐며 투덜대던 조합원들도 조악하게나마 만든 노브라티를 입어보더니 반색했다.
“이거 신세계잖아?“
만장일치로 프로젝트 시작에 동의했다. 노브라 옷의 필요성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지점이었다.
한 연예인의 노브라 소식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고, 사진을 찾아보고, 얼마나 티가 나는지 눈에 불을 켜고 들여다보는 사회다. 관심 없다 해도 수군거린다. 이런 세상에서 내 몸에 자유를 주면서도 타인의 무례한 시선도 받지 않는 옷. 브래지어를 벗더라도 팔짱을 끼거나 어깨를 움츠리며 나의 행동을 위축하지 않아도 되는 옷. 편안하면서도 안전한 옷은 우리 모두에게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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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업계 종사자가 아닌 우리들은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컴컴한 미로를 더듬더듬 집어갔다. 도안화를 그리는 단기 패션 디자인 수업을 듣기도 했고, 무턱대고 대형 쇼핑몰에 가서 수십 벌의 면 티셔츠를 뒤지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20년 가까이 의류 디자이너로 일한 친척분의 도움을 극적으로 받게 되었다.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전문가의 개입은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 뻔한 프로젝트를 단숨에 '고퀄리티 대량 생산'의 단계로 진입시켰다.
그러나 우리에겐 참고할만한 샘플도 패턴도 없었다. 모든 걸 처음부터 새롭게 개발해야 했다. 시중에 브래지어 착용 없이도 가슴 유두를 커버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티셔츠가 나와 있었지만 우리가 원하던 방식과는 달랐다.
'노브라티 프로젝트'의 목표는 확실했다. 상품 가능성과 브랜드 콘셉트를 갖춘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자. 가슴을 조이는 밴드를 없애자. 앞부분의 유두가 티 나지 않을 정도로 확실히 가리되 답답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시원하고 얇아야 한다. 몸매가 드러날 정도로 딱 붙지 않으면서도 벙벙한 홈웨어에서 탈피하자. 외출복으로도 손색이 없도록.
서너 번 세탁하면 올이 풀리고 쪼그라들어버리는 면 티셔츠를 생산하고 싶지 않았다. 꼼꼼한 마감과 탄탄한 원단으로 지어서 그만큼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원했다.
열 번 넘는 패턴 작업과 수십 벌의 샘플 제작이 이어졌다. 공장에서는 이렇게 해주는 경우가 없다며 손사레 치곤 했지만 나중엔 의뢰하지 않은 샘플까지 만들어주며 우리를 응원해주셨다.
“30만원 짜리 옷과 같은 봉제”라며 공장 사장님도 자부했다. 원가는 시중의 일반 면 티셔츠 판매가를 훌쩍 넘어버렸다. 마진율은 그만큼 줄었지만 비로소 품질만큼은 떳떳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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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여름 시즌에 가까스로 맞춰 출시했다. 백 벌만 팔려도 좋겠다며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했다. 그런데 놀랄 일이 벌어졌다. 얼떨떨하게도 사람들은 우리의 실험적인 제품에 열광해주었다. 1차 펀딩에서 3100%, 2차에서 1600%의 후원율을 기록했고, 5월~7월간 배송된 노브라티는 천 벌이 넘었다. 펀딩 플랫폼에 모여든 소비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후원에 동참해주었고, 펀딩 마감 후에도 구매 문의 연락과 메일이 빗발쳤다.
"8벌 째 구입입니다. 중독입니다. 못 벗어요. 또 주문합니다."
"남자들은 평생 이렇게 살아왔을 텐데. 이 편한 걸 왜 몰랐을까요."
"편하려고 입었는데 핏도 너무나 좋아요."
우리는 첫 프로젝트로 만족하지 않고 바로 개선안을 연구했다. 인건비까지 지불하고 나니 사실상 비용이 적자였지만 멈추기엔 아쉬웠다. 하나를 겨우 완성 했지만 장점만큼 문제점이 보였다.
여성 백 명이면 백 명 다 다른 가슴 높이를 기존 의류 사이즈에 맞춰 표준화 하는 작업이 관건이었다. 시중의 많은 노브라티들이 이걸 해결하기 위해 앞면에 두껍고 넓게 천을 덧댄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그만큼 겹쳐지는 면이 많아 더울 수 밖에 없고 둔탁해진다. 우린 이걸 개선하기 위해 앞판에 얇은 브라캡을 넣었고 딱 가슴 부위 만큼만 천을 덧댔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른 가슴 높이를 커버 하려다보니 사이즈가 6종이 넘어갔고 제작 비용도 치솟았다. 다시 또 연구와 샘플 제작을 반복했다.
3개월 넘는 샘플 제작과 연구. 그리고 방법을 찾아냈다. 브래지어가 끈 조절이 가능한 것처럼 안감에도 끈 조절 장치를 댔다. 피부에 자극을 주지 않는 플라스틱 조절 장치와 얇은 끈을 달았다. 상의 사이즈에 맞춰 입고 가슴 높이는 끈으로 조절하는 방법이다. 딱 필요 부위만 가리면서도 커버력을 좋게 할 수 있었다. 바로 특허 출원까지 진행했다. 겨울 내의 버전, 긴팔, 그리고 다시 반팔까지 1년 넘게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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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브라 티셔츠를 만들며 가끔 자문하곤 한다. 이게 꼭 필요한 걸까? 왜 우린 브래지어를 벗고 싶으면서도 이걸 ‘감히’ 벗지 못할까. 왜 이런 기능적인 티셔츠라도 있어야 할까.
누군가는 그저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인데 왜 ‘노브라’를 해라, 말아라,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고도 한다. 그런데 정말 ‘노브라’가 자유로운 선택의 하나일까. 편한 브래지어를 할 자유. 브래지어의 자유는 있지만 브래지어를 안 할 자유는 아직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지지 않지 않았나.
나는 외출할 때, 아직도 유두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옷을 입을 수 없다. 나처럼 많은 여성들이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규범 때문에 브래지어를 착용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가슴이 흔들린다거나 사이즈가 커서 지지해줘야 해서 착용한다는 답변은, 어느 언론사의 설문조사 결과 20%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 속에서 브라에 익숙해진 몸은 타인이 보든 안 보든 '꼭지'를 감히 노출하고 다닐 엄두를 내기 어렵다. 행여 누가 나를 바라보지 않을까 '자기 대상화'하고 검열한다. 노브라에도 적응과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만든 ‘노브라 티셔츠’는 허용된 선택지 자체가 넓지 않은 상황에서, '탈브라'를 위한 모험과 용기를 감행하지 않고도 편안함을 만끽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더 편한 브래지어라는 선택지, 가리고 덧입는 선택지가 아니라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도 가슴을 펼 수 있는 선택지로서 말이다.
아직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꾸준히 개발해 나가려 한다. 여성들의 브래지어 착용이 더이상 규범도, 억압도, 관심도 아닐 때까지.
*일상기술연구소의 노브라티는 와디즈에서 펀딩 진행합니다. 수익금의 일부는 유방암 환우회 젊유애에 기부합니다.
https://www.wadiz.kr/web/wcomingsoon/rwd/68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