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리 페미니즘 에세이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올립니다.
2018년, 첫 책 출간 준비를 하며 조금씩 쓰기 시작했고, 2019년에 샘플글과 목차를 쓴 다음 계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번 책의 방향이 바뀌며 써둔 글의 50%를 엎는 수정을 거듭하다 2020년 여름에 초고를 완성했습니다. 다시 퇴고에 퇴고를 하여 2021년 10월에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오래 준비한 책입니다. 아이의 5-7살, 그리고 저는 30대 후반과 40대로의 진입하며 겪었던 일과 고민들을 담았습니다.
”나는 묻고 싶다. “왜 그래야 하는데?”
무언가를 ‘어떻게 할지’, ‘잘할지’가 아니라 ‘그만두기’, ‘더 하지 않기’를 쓰고 싶다. 기혼여성들에게 요구되는 감정 노동, 가사 노동, 꾸밈 노동, 시간 관리 노동과 같은 추가 노동을 거부해가면서 자기 본위의 삶, 나만의 생활양식을 찾아가는 이야기.
기혼 여성의 페미니즘
“기혼 여성이 페미니즘을 한다는 것은 뭘까. 자신이 선 자리를 지속적으로 흔드는 일. 더없이 친밀해야 할 가족이라는 자리를 껄끄럽게 하는 일. 적당히 포기하며 안주하고 싶은 안락함을 스스로 거부하는 일. 자신의 맨 얼굴을 대면하며 모순과 분열에 수시로 휩싸이는 일이다. 내 삶이 페미니즘으로 인해 더욱 불온해지길 바란다. 페미니즘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열어둔다. 불편과 불안을 안고 희뿌연 전망 속으로 걸어간다.”
함께 공부하는 [트러블] 학인들이 먼저 읽고 소중한 추천사를 써주었어요.
신나리 작가는 끊임없이 묻는다. 그렇게 사는 게 맞나? 그럴 이유가 있나? 왜 그래야 하나?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사는가?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그곳부터 의심하고 탐구한다.
그의 질문은 같은 시대를 사는 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그가 특별한 이유는 그는 답이 나올 때까지 파헤친다는 점이다. “흔들리면 마음껏 흔들렸다”는 그를 내 삶에 투사하고 싶다.
김미영(노동전문 일간지 기자)
나는 그의 ‘다른’ 목소리를 사랑하며 잃어버린 내 목소리를 찾아왔다. 이 책 가득히 담긴 이야기에서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이거야.’라 는 통쾌함을 맛보았다. 엄마와 아내라는 위치에서 자꾸만 지워지는 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찾는 여성이라면 ‘그야말로 딱’이라고 느낄 것이다.
두둥 (세 남자와 동거중)
신나리 작가는 끝까지 간다. 삶에서도 글에서도, 중간에 어설프게 봉합하거나 자기합리화로 눙치는 법이 없다. 그런 까닭에 문제가 무 엇인지를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읽는 이를 아프게 한다. 집중 육아기 여성의 분투과정을 타협 없이 그려낸 <엄마 되기의 민낯>을 읽었을 때 나는, 육아 에세이로 만날 수 있는 최대치의 치열함을 여기서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후를 담아 낸 작은 책 한 권이 내 손 안에 왔다. 펄펄 살아 역동하는 이 책을 읽다 보면, 그와 함께 여자로 살고 있는 내가 퍽이나 더 괜찮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상상에 빠진다.
김진영(<함께읽기는 힘이 세다>, <한 학기 한 권 읽기> 공저자)
이 책의 힘은 그의 어떤 ‘주장’에 있지 않다. 그러한 생각을 하기 까지 겪는 분열과 혼란, 그리고 자신의 ‘찌질함’까지 한 올도 감추 지 않고 생생하게 고백하는 데 그 힘이 있다. 그는 이제 “what to do”가 아닌 “how to do”의 자세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탐구하는 자세로 살겠다고. 그가 삶을 대하는 이 태도가 바로 여성으로, 엄마로, 아내로 모순을 겪는 현실을 헤쳐나가는 최선의 무기가 아닐까 싶다.
홍승희(오늘도 분열하는 책 읽는 직장인)
또 많은 추천사가 책에 실려 있습니다.
책의 서문 전체를 공개합니다.
시작하는 글.
어떻게 하면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을까.
10여 년 전부터 스스로에게 물었다. 존재를 성찰하는 듯한 그럴싸하고 심오한 질문. 30대 초반에 이런 성숙한 질문을 던진 내가 뿌듯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 결혼까지 무사히 도달하며 사회가 규정한 표준적 삶에 뒤쳐지지 않게 살았다. 다음은 무엇이던가. 속세의 풍파에 닳은 자아를 회복해야 했다.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순수한 자아를 찾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만 쏙쏙 골라 거침없이 진행해, 원하는 모습에 도달하는 자아실현. 그것은 내가 맹신하던 진리였다.
월급에 저당 잡힌 삶을 살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막연하고 아름다운 이상을 품었다. 연봉을 올린다거나 재테크를 하는 세속적인 성공과는 다른 방법을 찾으려 했다. 퇴사를 하고 귀촌하거나 세계일주를 떠나는 이들을 부러워하곤 했지만, 차마 그럴 엄두는 내지 못했다. 내가 ‘다르게 살기 위해’ 했던 방법은 사회가 알려준 안전한 일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직장을 옮긴다거나, 퇴근 후에 강의를 들으러 다닌다거나, 큰돈을 들여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기존에 영위하던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직장인 모드’와 ‘나 모드’ 사이의 균형을 맞춰줄 활동을 부지런히 소비했다.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일과 동시에, 돈은 벌지 못하지만 보람찬 취미 활동을 했고, 인문학 책을 목록화해서 읽어가며 지적 욕구를 충족해 갔고, 산으로 들로 바다로 여행을 다니며 일상에만 얽매여 있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일도 놀이도 열심히 하다 보니 과부하가 자주 걸렸지만 번번이 탈진하고 미끄러지면서도 나를 찾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
이런 삶에 제동을 건 결정적 경험은 출산과 육아였다. 자아실현에 매진하던 사람이 집 안에 손과 발이 묶여 꼼짝을 못하게 되었다. 유급 노동, 사회적 관계망, 여가 활동이 보장된 위치에서 탈락하면서 자아는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내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자리는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성역할이었다. 가사, 육아라는 돌봄 노동이 한 무더기 내 앞에 놓였다. 주민번호 앞자리에 붙은 ‘2’라는 번호를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변화를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20대에도 성공적으로 결혼 시장에서 발탁되기 위해 수행해야 했던 ‘여성다움’이 있었고, 결혼 제도에 편입되며 겪어야 했던 성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기대하는 상냥함이나 꾸밈을 보이고 얻는 좁쌀만 한 이득 속에, 경제적 자립이 보장하던 위태로운 안정 속에, 소비가 주던 짜릿한 만족 속에 쉽게 만족한 탓에 은폐하고 묵인하며 외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주 양육자가 되어 집안에 갇히게 되자 나의 사회적 자아를 적절히 치장할 수 있던 장치가 모조리 없어졌다. 완전히 헐벗게 되었다. 그 전까지 내가 ‘나’라고 믿으며 실현하려던 건 대체 무엇이었나. 엄마가 되었지만 엄마가 된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헤맸다. 무너지고 지워진 나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기를 썼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주위를 돌아보면 동료들, 친구들, 지인들 모두 처음 겪는 힘겨운 엄마 노릇 속에서도 잘해보겠다며 분투하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경쟁 사회에 순조롭게 적응했고, 수년간의 커리어를 갖고 있으며, 경제적 능력으로 따라오는 성취감을 알고, 목표 실현에 대한 욕구가 강한 나 같은 여성들은 가정을 꾸린 후에도 뭐든 열심히 했다. 엄마로 사는 일에도 나로 다시 사는 일에도.
사회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먹는 우리들에게, 엄마 되기에 필요한 역할과 과업을 던져줬다. 아이 키우기는 목표와 과정이 촘촘히 짜인 프로젝트와도 같았다. 잠자리, 수유, 이유식, 신체 발달, 언어 습득 등 매 발달 단계마다 ‘교육’, ‘훈육’, ‘습관’으로 이름 붙여진 수행해야 할 육아 미션이 있었다. 넘쳐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내 아이에게 맞는 걸 선별하고 얼마나 잘 실천하느냐가 엄마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냥 엄마가 되면 안 되었고 ‘좋은 엄마’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 하기만 하던 나는 스스로를 ‘루저 엄마’라고 자책했다.
엄마로만 살아서도 안 됐다. 누구 엄마로만 살다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됐다. 자는 시간 쪼개가며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 먹고 재우는 일에 허덕이던 영유아기 육아에서 한 발짝 벗어나자 다른 초조함이 닥쳤다. 외국어 공부, 운동, 독서, 글쓰기 등의 자기 계발이라도 하고 있어야 쓸모가 증명되는 듯했다.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을 달랠 길이 필요했다. 엄마 역할이 집중적으로 필요한 시기는 짧으면 3년, 아무리 길어도 10년 정도라고 했다. 그 후에도 부모 노릇은 끝나지 않지만 나는 평생 자식만 따라다니는 엄마는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직장을 가질 준비를 해야했다.남편과의 관계 회복도 필요했다. 육아에 헌신하지 않는 남편을 너무 미워하거나, 서로 힘들다고 싸움만 하다 관계가 파탄에 이르러서는 안 되었으므로, 칭찬과 위로, 협상, 타협의 기술도 익혀가야 했다. 집 구역별로 청소 리스트를 짜고 주말에 가족 나들이를 계획하며 일정을 조율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아무도 점수를 매기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시선 속 평가에 나를 놓았다. 집안의 청소 상태에 책임감을 느끼고 아이의 발달을 의식했다. 다른 집 아이보다 살이 찌지 않거나 말이 느리거나 식습관이 좋지 않으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하고 행동부터 검열했다. 나 자신도 관리 대상으로 삼았다. 번듯한 직장을 가지지 못할까봐 조바심 났고 애써 쌓은 경력을 잃을까 두려웠다. 나의 몸도 감시했다. 매일 체중계에 오르고 뱃살을 움켜잡으며 허기를 견뎠다. 타인의 삶을 곁눈질했다. 복직하여 승진한 동료나 재테크로 자산을 불린 이들을 시기했다. 기념일을 살갑게 챙기고 사랑 표현을 과감히하는 부부들을 볼 때면 입이 뾰족하게 나왔다. 나의 건조한 부부생활이 ‘비정상’처럼 보였다.
스스로에 대한 과중한 부담은 다른 스트레스를 만들어냈다. 육체적 정신적 체증을 씻기 위한 소비가 필요했다. 아이를 재우고 ‘육퇴(육아 퇴근)’라고 부르는 시간이 되면 야식과 음주에 심취하거나 드라마나 유튜브를 시청하며 시각적 쾌락을 탐닉했다. 또는 온라인 쇼핑으로 시간과 육체의 에너지를 탕진했다. 모든 긴장을 풀어버리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시간은 이완이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며 수년 간 이런 탐닉의 시간을 보냈던 나는 왜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은지 의문이었다. 몸이 스트레스와 피로를 느끼면 쉬어야 하는데, 도리어 나는 피곤한 몸을 내 자신으로 방해하는 적으로 간주했다. 쉬는 것을 패배로 받아들여 죄책감을 가졌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때조차 스마트폰을 끝없이 들여다보면서 허기를 달랬다.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다고 안도하며.
아이를 돌보고, 일을 하고, 집안을 치우고, 요리를 하고, 거기에 또 시간을 내어 스스로에게 부과한 과업을 하고. 몸이 피곤해도 모든 자극을 끊어내고 마음 놓고 쉬지 못하는 모습. 나를 비롯한 기혼여성들의 현주소가 아닐까. 기존의 역할에 부여된 노동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신을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채찍질하는 생활. 가족에서도 사회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발버둥치며 자신을 혹사시키는 삶. 이런 모습이 ‘일과 삶의 균형’이나 ‘육아와 삶의 조화’라는, 평화를 가장한 말로 변형되어 여자들에게 적용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노력은 혼자만의 곡예거나 외줄 타기는 아닐까.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는 말이 정작 알맹이는 없는 번드르르한 껍데기임을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건 도달할 수 없는 목표였다. 그 말은 “너 자신으로 사는 건 좋지만 엄마와 아내라는 직무엔 충실해. 그리고 너의 시간은 약간의 틈이 날 때만 가져. 남편이나 아이에겐 한 톨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돼”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았다. 그건 마치 한때 내가 이룰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성과도 내면서 여가도 충분히 즐기는 직장인’이라는 모순된 자아실현과도 같았다. 여성을 위한 많은 자기계발서들은 그것이 마치 가능한 양 주문을 걸지만 아내와 엄마로서 해야 할 노동은 줄지 않고 늘어만 간다. 아내나 엄마로서의 직무는 그대로 둔 채로 별도의 시간을 더해 가는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쓰기 시작했다. 전작 <엄마 되기의 민낯>은 아이의 1세부터 4세까지의 양육 경험과 나의 고민을 담았었다. 아이를 잘 키우는 방법이 아니라 나에게 벌어진 일을 기록했다. 엄마가 되는 과정에 겪은 충만함부터 결핍감, 자아 분열, 분노를 나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번 책은 아이가 7세가 되고, 나는 40대로 진입하면서 내가 수행해야만 했던 여성성과 가족 내에서의 역할에 대해 고민을 넘어 재정의를 하고자 했다.
아내, 엄마, 여자라는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어떻게 잘 할 것이냐’라는 문제를 지워버리고 왜 ‘잘해야 하느냐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나를 사랑하자는 말을 구호처럼 외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내 몸을 바라본다는 것은 뭘까. ‘스위트홈’이라는 가족의 이상향은 대체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그걸 위해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엄마와 아이가 인간 대 인간으로 공존하는일은 가능한가. 정교하게 관리하고 조절하는 시간의 톱니바퀴 속에서 어떻게 해야 짓눌리지 않을까. 무엇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찾고 싶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몸과 정신력을 밀어붙이는 자기계발, 외부의 시선에 부응하기 위한 자기평가, 막연한 이상향을 꿈꾸는 자기실현이 아닌 방식을. 자기 성장이나 발전이라는 경로에서 이탈해도 체념과 무기력으로 떨어지지 않는 삶의 양식을.
*
글을 쓰며 문턱에 여러 번 걸렸다. 이렇게 써도 될까. 여기까지 써도 될까. 독자에게 얼마나 쓸모 있을까. 글에 담긴 주장이 누군가에게 거부감처럼 느껴질까 의식했다. 과격하거나 편협한 관점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떨치기 어려웠다.그러나 그것 또한 내 글에 취해 있는 도취와 망상이며, 내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든 변명하려는 자의식 과잉일 뿐임을 깨달았다. 이런 자기 인정에 다다라서야 탈고를 할 수 있었다.
10년 전 자아실현에 매진하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은 여전하지만 풀어가는 방식이 달라졌다. 나는 그 이유를 나를 성가시고 불편하게 하고, 울분에 젖게 하고, 밤잠을 못 이루게 하고, 때로 들뜨게 한 이들 덕이라고 본다. 나의 자리에서 부딪친 수많은 만남은 나에게 너를 돌아보라고, 너의 삶을 재구성하라고 소리 없이 몰아붙였다. 단지 나에게 의문을 던지면서.
이 책에 실린 에세이는 사회와 타인과 그리고 나 자신이 빚어낸 마찰의 결과다. 이제는 안다. 나 자신이 된다는 건 순수하고 진정한 내가 되는 완성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그때그때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라는 것. 무엇이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지난 1년 넘게 일상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해온 공부공동체 ‘트러블’ 학인들과의 시간 덕에 설익었던 내 글은 비로소숙성될 수 있었다. 서로의 존재에 거침없이 침투하는 우리들의 우정이 더욱 연마되길 바라며,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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