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가 10년 동안 내게 걸어온 말들
향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올라오는 길이다. 오늘 먹었던 반찬의 여운이 찝찝하다. 이 감각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는 유일한 음료는 커피다.
사무실 문을 열자 사장님이 고객과 함께 안쪽 테이블에 앉아 있다.
“김 과장, 커피 두 잔만 부탁해.”
정수기 옆에 붙어있는 거치대에서 종이컵 2개를, 위에 놓인 박스에서 믹스 커피 두 개를 꺼냈다.
봉지에 들어있는 믹스 커피는 설탕, 프림, 커피가 정해진 비율로 들어있다. 뜨거운 물만 있으면 누구나 비슷한 맛을 만들어 낸다. 커피를 기다리는 사람도 믹스 커피에는 특별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커피를 타는 사람도 믹스 커피를 탈 때는 요령이 필요 없다. 나는 지금 5명 규모의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여기에는 믹스 커피만 있다. 이전 직장에서 근무할 때는 다양한 커피를 탔다.
대학 졸업 직후, 10여 년 간 상장 회사 전략기획팀에서 일했다. 담당 업무 중 하나는 회의체 관리였다. 회의 안건과 일정을 공지하고 진행을 맡았다. 운영 총괄이라 커피 준비도 업무의 일환이었다. 임원 수만 13명, 팀장들까지 더하면 30명 정도가 회의에 참석했다.
회장실 옆 탕비실은 두 사람이 서있기도 빠듯했다. 사각 테이블 위에는 커피 메이커와 3단 서랍장이 있었다. 맨 아래 칸에는 고급 커피 잔과 받침이, 두 번째 칸에는 인스턴트커피와 원두, 각종 티백이 들어있었다. 세 번째 칸에는 냅킨과 티스푼, 일회용 종이컵이 들어있었다. 전임자는 훑듯이 물품들을 설명한 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아무나 들어오면 안 돼요. 직원들 커피는 사비로 먹는 거고 여기는 임원들을 위한 커피만 제공하는 곳이에요. 보안 철저히 해주세요.”
커피 타는 일은 나름의 기억력과 복합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회의 종류와 참석하는 사람에 따라 커피 세팅이 달랐다. 본부장급 임원 5인이 참석하는 회의는 회장실에서 오전 10시에 시작한다. 탕비실의 위치가 가깝고 참석 인원이 적은 편이었다. 덕분에 고급 커피잔에 모두 동일한 커피와 다과를 준비해 내 갈 수 있었다.
임원과 팀장을 포함해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회의는 대형 회의실에서 있었다. 회의실과 탕비실은 거리가 멀었다. 회의실 안에는 정수기만 있었기 때문에 커피를 준비해 옮겨야 했다. 커다란 쟁반 위에 원두커피가 담긴 보온병, 카누, 믹스커피, 녹차 티백, 설탕, 티스푼, 종이컵을 보기 좋게 줄 세웠다.
커피를 내어줄 때는 임원별, 상황별로 다양한 것을 고려해야 했다.
우선 커피 온도가 중요했다. 대게는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식혀가며 먹었지만 그날 회의의 안건이나 상황에 따라 온도를 달리 하기도 했다. 말을 많이 할 것으로 예상되는 임원은 너무 뜨겁게 타주면 안 됐다. 찬물을 섞어 대화 중간에 커피로 입안을 적시고 바로 삼켜 버릴 수 있는 온도로 맞춰서 내줘야 했다.
“내일 오전 7시 반, 오늘 터진 A사 대량 불량건 대책 회의 소집해, 최전무가 발표하기로 했으니까, 박 부장한테 전화해서 발표 자료 받아놓고.”
그날 회의에서 최전무님의 커피는 미지근한 온도로 내주었다.
임원별로 커피를 마시는 공식도 달랐다.
회장님은 블랙커피만 마셨다. 선물 받은 원두나 인터넷에서 산 원두를 일주일에 한 번꼴로 근처 스타벅스 매장에 가서 갈아왔다.
한 번은 사향고양이의 배설물에서 얻는다는 ‘루왁 커피’를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워낙 특이한 원두라 내심 궁금했다. 그날은 원두를 내릴 때도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회장님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다시 한 모금을 입에서 굴리는 듯하다가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야, 이거 쉬었다. 버려라.”
회장님의 입맛은 루왁커피의 풍부한 향미를 따라갈 수 없었다. 루왁 커피는 본죽 통에 담겨 탕비실 구석에 놓였다. 탕비실에서 은은한 커피 향이 날 때마다, 그날의 허무함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방향제였다.
상무 이상의 임원들은 회장님과 같은 커피였다. 직급 순으로 커피를 내어주기 때문에 참석한 인원이 많으면 원두커피는 다 떨어졌다. 이후부터는 인스턴트커피인 카누를 타줬다. 커피를 못 먹는 분들도 있었는데 처음에는 녹차나 맹물을 먹다가 어느 날인가부터 커피를 마셨다.
“오늘도 물 한잔 드릴까요?”
“아니, 윗사람이 커피 먹는데 나만 물이면 좀 그렇잖아. 설탕 2스푼 듬뿍 넣은 커피로 부탁해.”
부장급 이하는 쟁반 위에 준비된 믹스 커피나 카누를 스스로 타 마셨다. 그래도 커피 스타일은 기억해 둬야 했다. 임원의 질문에 대답하느라 커피 탈 타이밍을 놓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평소 스타일을 기억해 두었다가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부장님 앞에 살짝 커피를 내려놓았다.
제조팀 부장님은 믹스커피 두 개를 종이컵 하나에 타 먹었다. 거칠게 휘저어서 커피가 종이컵 밖으로 넘치는 일이 많았다. 생산 라인을 관리했는데 항상 화가 많았다. 복도에서 소리 지르거나 욕하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 종이컵 옆면의 커피 얼룩이 더러울수록 ‘스트레스가 많구나’ 생각했다.
영업팀 부장님은 카누를 뜯어 반만 탔다. 연한 커피를 좋아하는 건지 나머지 반은 쟁반 위에 그대로 두고 갔다. 남은 커피의 일부는 쏟아져 나와 쟁반 위에 걸쳐져 있었다. 누가 치워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낭비가 몸에 배어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남긴 것인지는 모르겠다. 친한 재무팀 동기가 매달 메신저로 영업팀 카드 사용 내역을 읊으며 화를 내곤 했다.
[오후 1:27] 하 과장 : 사업장 이름이 장미, 목련… 밤마다 여기서 꽃 사겠냐?
[오후 1:27] 김 과장 : 접대하느라 그러겠지, 그런 데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대접받겠지?
쟁반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카누를 보고 있으면 영업팀의 이번 달 카드 값이 궁금해지곤 했다.
구매팀 부장님은 영업팀 부장님이 남기고 간 남은 카누 반을 종이컵의 반절정도 되는 적은 물에 타 마셨다.
“이거 누가 남겼어? 회의 때마다 남는 거 두세 번 만 모으면 500짜리 물통에 타 먹을 만큼 되겠다.”
누구보고 들으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남겨진 카누가 있으면 항상 하는 멘트였다. 그리고는 쟁반 위에 쏟아진 커피 알갱이들을 손가락으로 쓸어 담는다. 미처 담기지 못한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부장님의 실내화가 보인다. 흰색 나이키 로고였을 V자가 잿빛이다.
어느 날처럼 주요 임원을 위한 회의를 준비 중이었다. 커피 잔을 꺼내 쟁반 위에 올려두고 허리를 낮춰 커피 잔을 눈높이에 맞췄다. 깨지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염은 없는지 살피고 있는데 후배 직원이 들어왔다.
“과장님, 과장님은 이 일 좋아하세요?”
“…응?”
“저는 커피 대충 타거든요. 그런데 과장님은 왜 이렇게까지 정성 들여하세요?”
커피 잔의 금박 손잡이에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비쳤다. 순간 커피 잔을 집어던져 산산조각 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분위기를 읽고 타이밍을 맞추며 커피 스타일 하나까지도 디테일하게 챙기고 보살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나를 알아보고 좋아할 테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정성은 누군가를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거나, 당연히 기대되는 기본 값일 뿐이었다. 심지어 후배에게는 지나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오로지 커피 타는 일이 지겨워서 회사를 뛰쳐나온 것은 아니었다. 회의체 관리 업무 외에 많은 일에서도, 내가 타인의 만족을 위해 과도한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스스로를 지우고 있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어느 한편에 쌓여 썩고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나는 듯했다.
퇴사 후, 2년이 넘는 공백기를 가지며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 시기에 시간과 돈을 들여 커피를 배웠다. 원두의 산지 별로 향을 맡고, 다양한 도구로 추출하고 맛을 보면서 처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취향이 이런 거구나!”라고 느꼈다.
아침마다 나는 찬장에서 밀봉된 에티오피아 시다모 원두와 저울을 꺼낸다. 스쿱으로 20g을 달아 핸드밀에 넣는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원두의 향기가 깊어진다. 드리퍼에 원두를 담는다. 일정한 물줄기가 원두 입자에 고르게 퍼질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물을 붓는다. 커피가 작은 거품을 내며 부풀어 오른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방울에 덮여 포근해지는 기분이다. 커피를 통해 나는 내 감각을 되찾았다.
커피를 내릴 때, 가장 나 다운 시간이 찾아온다. 머릿속은 비워지고, 오직 감각에만 집중한다. 원두의 분쇄도, 물의 온도, 그리고 드립 포트의 물 관에서 느끼는 힘의 균형. 어느 것 하나 대충 지나칠 수 없다.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모여 결국 한 잔의 맛을 결정짓는다.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시간이다.
한동안 커피에 빠져 전국의 커피 박람회와 로스터리 카페를 돌아다녔다. 수입이 없어 한 동안은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현실적인 이유로 지금의 중소기업에 재취업했다.
이곳 중소기업에서 커피를 탈 때 고려할 것은 단 하나다. 믹스커피 봉지로 저을지, 티스푼으로 저을지. 티스푼은 물이 반쯤 담긴 컵에 기대어져 있다. 컵 안의 물은 자주 바꾸지 않아 물 색이 탁하곤 했다. 영 찝찝하면 정수기 흐르는 물에 대충 헹구어 저었다. 급할 때는 그마저도 생략했다. 빠르게 커피를 타야 할 때는 티스푼 대신 잘라낸 믹스커피 포장지를 이용해 휘휘 저었다. 뜨거운 물에 포장지 절단면이 닿으면 유해 물질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그 편을 선택했다. 탁한 물은 내 책임처럼 느껴지지만, 포장지에서 나온 성분은 커피 제조사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화 중인 사장님과 고객 앞에 종이컵을 한 잔씩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들은 종이컵의 3분의 2 정도 담긴 믹스커피를 홀짝였다. 싱겁다고도 진하다고도 하지 않는다.
모니터 옆에 분홍색 텀블러가 보였다. 아침에 직접 내린 핸드 드립 커피가 담겨있다.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갓 내린 커피만큼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온기가 남아있었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자 은은한 재스민 향기가 느껴졌다. 혀의 미뢰 하나하나에 감각을 곤두세웠다. 목구멍을 넘어갈 때 즈음엔 시큼한 오렌지 맛이 났다. 입안이 청량해진 기분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넣었다. 혀끝에 남은 향을 오래도록 굴리며 삼켰다.
나는 여전히 커피를 탄다. 누군가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그러나 확실한 것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커피를 타지 않는다.
커피 맛을 모르던 20대 초반의 대기업 신입사원 시절부터 중소기업 경리가 된 30대 후반의 지금까지 커피는 매일 언제 어디서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에게 커피는 권력이자 계급의 상징이었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단이자 깨달음을 준 매개체다. 그리고 오늘의 커피는 내게 가장 큰 위로이자 자부심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루왁 커피보다 더 맛있는 커피를, 나는 안다.
-향다 (25.4.20)
*<퇴고로 완성하는 글쓰기 캠프>에서 한 달 동안 4회 이상의 퇴고를 거쳐 완성된 글입니다.
https://contents.premium.naver.com/bitterpassion/barewriting/contents/250130114621667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