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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교동 Dec 05. 2021

(2) 당근 인턴기: '일' 잘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험난한 일잘러의 길

인턴십 3주 만에 기능 배포(짝짝~)

인턴십을 시작하기 약 2주일 전, 오리엔테이션을 들으러 신논현에 소재한 당근 사무실에 들르게 되었다. 그때 회사 관계자께 들었던 계획은 2달 동안 프로덕트를 개발한 뒤, 1달 동안 시장 반응을 보며 서비스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과 달리 막상 인턴십이 시작되고 나서는 인턴 팀들 내에서 '최대한 프로덕트를 빠르게 배포해서 반응을 보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않되) 지금 생각하면 이때의 '배포 전쟁' 시절이 MVP의 취지와 더 맞는 스케줄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서비스 초기, 개발 첫 타자로서 느낌은 이랬다:

표정이 다 설명하고 있으니까...


인턴십 첫 주에는 팀원들과 데스크 리서치와 기획, 스케줄 짜는 데 전념하였다. 어느 정도 개요가 잡히고, 둘째 주부터는 디자이너가 달릴 차례였다. 치타에 쫓기는 가젤의 심정으로 나는 와이어프레임을 설계하고, 대충 기능 명세서가 완성되며 백엔드 개발자님은 기능 개발에 힘쓰셨다. 실 화면이 확정되자마자 3주 차에는 우리 천재 프론트 개발자분께서 화면을 열심히 만들어주셨다. 덕분에 우리 팀은 3주 만에 1차 스펙(사장님이 설문을 제작하실 수 있는 기능)을 배포하였다. 이런 빡빡하고도 알찬 스케줄로 팀은 야무지게 굴러가고 있었다.


.... 라지만, 이 시기, 나는 '일을 잘한다'라는 의미에 깊게 고민하게 되었다. 과연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일까? 단순히 내 직군 일을 잘하는 것이 ''을 잘하는 것일까?


나의 직무를 소개하자면

나는 사용자에게 최적의 경험을 제공하여 서비스의 성장을 돕는 프로덕트 디자이너이다. 주니어 레벨 디자이너로서 강점은 빠르게 화면을 설계하는 편이고, 동일/타 직군과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편(이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부끄)이다. 인턴 1년 차 정도 된 초초초 주니어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1인분의 퍼포먼스는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디자인할 때 '즐거워 보이는지'는 한 번에 알 수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맥북을 붙잡고 떨어질 생각이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지금 디자인하는 것이 즐겁다'는 뜻이다. 보통 쫓기는 스케줄 속에 압박감을 느끼면서 화면 설계를 할 때 이런 경향을 보인다.


소위 '스불재'라고 하는 유형...

... 말하고 보니 약간 Majo 같긴 한데, 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유저 경험을 깊게 고민하며 플로우를 그려낼 때 가장 즐거을 느낀다. 앞서 말했던 2주 차가 딱 적토마처럼 디자이너가 마구 달려야 하는 시점이었다. 쫓기듯이 화면을 설계하고, 수많은 피드백들에 휩쓸리며 와이어프레임을 3번이나 갈아엎었지만, 덕분에 짧은 기간 동안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처럼 난 디자인에 몰두할 때 즐거움을 느낍니다. 근데 뭐가 문제냐고요?


문제가 뭘까.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1인분은 일단 해내고 있잖아. 그런데 과연 와이어프레임과 화면을 빠르게 잘 찍어내기만 하면 좋은 프로덕트 디자이너일까? 3주 차부터 프론트 분이 바빠지고, 나는 일주일 동안 시간이 뜨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할 일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프로덕트가 유통되는 채널에 들어갈 문구나 콘텐츠, 브랜딩 등 부가적인 일이 나에게 주어졌다. 당근이라는 회사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MVP 인턴십 프로그램 특성상 3인 스타트업처럼 진행해야 했던 면이 있었기에, 모든 시각적/커뮤니케이션적 업무는 내가 처리해야 했었다.


그러나 나는 설계 업무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업무를 귀찮아하는 경향이 강했다. ENTP라 그런가 특히 브랜딩의 경우 내가 자신 없는 분야였기에 네이밍, 로고 등을 디자인하는 것을 질질 끌고 있었다. 아직 개발이 덜 되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합리화하며 비교적 흥미가 없던 태스크를 미루고 또 미뤘다. 브랜딩 생각을 잘 안 하다 보니, 실제로도 정말 아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시간이 길어지고 있던 찰나, 나처럼 이미 자신의 태스크를 끝낸 백엔드분은 내 자리에 오셔서 같이 문구나 네이밍, 브랜딩 등을 고민해주셨다. 나 혼자 한참 걸렸던 일들이 백엔드님의 도움 덕분에 반강제적(?)으로 하루 만에 다 끝났다. (심지어 우리 서비스 네이밍은 백엔드 분이 정하셨다......)


아니 하루도 안 걸리는 일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나는 '일잘러'가 아니었다. 진정한 '일잘러'는 직군에 알맞은 능력을 가진 것은 기본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우선순위를 정해 빠르게 쳐내는 사람이다. 이 태스크들을 '관심 없는 분야'라고 정의해버린 후, 오만하게도 나는 '지난주까지만 해도 너무 일이 재밌었는데, 지금은 너무 재미없어요'라고 말하며 스스로 우울감에 빠져버렸다. 일이 모두 다 재밌다면 베스트지만, 회사에 소속된 이상 재밌는 일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전의 회사에서도 이미 경험했던 문제였었다. 제한 시간이 주어지면 설계는 빠르게 하는 반면에, 관심사 밖의 일이 주어지면 끝없이 늘어지곤 했었다. 그런데 그때는 '프로덕트만 잘 만들면 돼지'라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있었다.(근데 나 프로덕트도 잘 못 만들었잖아)


부끄러웠다. 전 회사에서 오만했던 내가 부끄럽고, 지금 회사에서도 일처리를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글에서 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면까지 건드리는 것 같아서 다른 면에서도 부끄러운데, ㅋㅋ 내가 하고 싶고, 재밌는 일만 한다면 그것은 본능만 따르는 짐승이나 아기와 진배없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너무 부끄러워 스트레스를 받던 차, 일/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친구와 이 문제를 의논했다.

"차라리 초반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선순위를 정해. 언제까지 하겠다 시간을 정하고 일을 해. 그렇지 않으면 계속 이거 했다 저거 했다 하게 되는 거야."


아 명치 아파. 뼈를 세게 맞고는 그때부터 노션에 하기 싫은 태스크까지 마감 시간을 적어 놓았다. '죽어도 12시까진 해야 해!'라는 심정으로 스케줄을 정해놓고 하기 시작하니 정확한 마감 시간을 맞추지 못해도 웬만하면 퇴근하기 전까지는 일을 마쳤다.

사실 완전 개비스콘은 아니고, 세미 개비스콘 정도...?

아직도 한 인간/직장인으로서 도 닦는 중이다. 좋은 UX/UI 디자이너가 되는 것도 어려운데 일잘러가 되는 것 또한 어렵구나. 그래도 이번 당근 인턴십을 통해 모르고 있었던 나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책임감으로 일을 처리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했지만, 커버해야 하는 책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컸었던 것 같다. 일처리를 빠르고 깔끔하게 하는 것은 어렵지만, 문제를 인지한 만큼 개선하려고 노력 중이다. 일잘러가 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 지켜봐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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