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씬'이라고 부르는 문화 예술 분야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개인이 가진 특성, 지성, 철학, 가끔은 외모까지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곳이다. 그림을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룰루랄라 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어쩌다 이 씬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지내면 지낼수록 좋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렵다. 독립출판을 하면서 만나게 된 좋은 작가, 기획자, 나아가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 동료들이 있어 정이 많고 따뜻한 곳이라는 확신이 있지만, 우리 모두가 고민하는 지점은 비슷한 곳을 향해있어서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렇니까 예술인 혹은 창작자 나는 그 둘이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해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어쨌든 이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이 길의 끝이 무엇인가에 대한 막연함을 안고 산다. 그 막연함을 조금 더 확실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결국 조금 더 '알려질만한' 작업을 하는 것, 그것이 출간이든 매체 출연이든, 소셜 네트워크든 간에. 그 막연함을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의 방향은 누군가에게 '알려지는 것', 유명(有名)을 향한다.
예술가가 엔터테이너도 아닌데, 왜 그런 걱정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대 미술 역사상 예술가가 엔터테이너가 아닌 적이 있었나 싶다. 일단 유명해지고 보라는 말의 저작자가 익히 들어 유명한 앤디 워홀인데, 말해 뭐해. 정말 앤디 워홀 선배님의 말처럼 일단 유명해지면 되는 걸까? 하지만 유명해지는 건 지극히 보통 사람인 내 삶과는 거리가 매우 멀어 보인다. 유명한 삶에 대해서 딱히 생각해 본 적 없고, 추구해 본 적도 없다. 근데 이 유명이라는 것이 작가의 삶에는 필요한 요소같이 느껴진다.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 도움이 누구에게서 오나? 하늘로부터 뚝 떨어지는 것이면 참 좋겠지만은, 실제로는 클라이언트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클라이언트의 주머니. 그 주머니를 열려면 클라이언트의 귀에 한 번쯤은 들려야 할 것이고, 보여야 할 것이고, 느껴져야 할 것이고... 그러니까 클라이언트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누군가가 되려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나 여기 있소!를 알려야 한다. 가만히 방구석에서 그림만 그린다고 누가 알아주는, 그런 세계가 있다면야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마는, 그런 세계는 없다.
결국 스스로 행동을 취해야 한다. 그림 봐달라고 어디든 올리고, 글도 써야 한다. 종종 사진도 찍고 찍히고, 이미지를 계속해서 만들어야 한다. 창작인지 구걸인지 알 수도 없는 미묘한 경계에 서서, 드디어 그의 주머니가 열리는 걸 바라보며 눈물짓는 게 어쩌면 궁극의 창작 행위는 아닐까. 결국 이것이야말로 창작의 과정이며 창작의 결과는 아닐까.
그래서 자꾸 서글퍼진다.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닌데, 결코 단 한 번도 그런 마음으로 작업을 대한 바가 없는데, 외부로부터 그렇게 여겨지는 것에는 늘 속수무책으로 당하고야 만다. 숫자로 증명하는 삶이 싫어서 도망쳐 나왔더니 새로운 숫자다. 수강생을 몇 명이나 모객할 수 있는지, 독자를 얼마나 끌어올 수 있는지, 책을 얼마나 팔 수 있는지, 계속해서 내 이름을 걸고 팔아야 할 것들이 생긴다. 판매고가 이름의 값이 된다. 그런 걸 이름값이라 부른다.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모든 게 말이 되는 곳이 문화 예술 씬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또 어쩔 수 없이 창작이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구걸을 하기 위해 주섬주섬 채비를 한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 있기는 하다. 풍요로운 삶을 포기하면 된다. 이 말을 쓰고 지금의 내 모습을 슥 훑어보니 그다지 풍요롭게 사는 것도 아니다. 겨우 코딱지만 한 원룸에 전세 대출 갚으며 사는 삶에다 대고 풍요롭다 말할 수 있나.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풍요로운 삶을 포기하면, 외부로부터 오는 물질적인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더욱더 아무거나 그리고, 아무거나 쓰고, 아무 말이나 하고(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굽신거리는 구걸의 행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삶, 견적 밀당을 하지 않는 삶, 돈 안 받아도 되니까 대충 그릴 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조카 지온이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장난감을 입에 넣고 하루 종일 빨다가 싫증 나면 멀리 던져버리고, 때 되면 기저귀에 똥 싸고 오줌 싸고 그렇게 살고 싶다. 하지만 사회의 구성원으로, 다 큰 성인으로 살아가는 이상, 그러면 안 된다.
그래서 엘엠티비 프린팅 하우스라는 걸 만들어 그나마 위안 삼고 있다(이름도 유난히 길고, 매사 암튼 구구절절한 스타일).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걸 그려서 판다. 이걸로 전세 대출금이라도 조금씩 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뭐 그런 걸 바랄 정도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지는 못 한 실정이다. 그래도 일단 이 행위를 통해 적어도 나는 이 지긋지긋한 세계로부터 잠시 피할 수 있다.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그림이 아니어도 상관없고, 마음에 들면 감사하고, 어쨌든 그때 그 순간 온전히 좋은 기분에 사로잡혀 그려낸 그림이다. 그림에는 그린 사람의 정신이 깃든다고 믿기 때문에 엘엠티비 프린팅 하우스에 올라간 그림은 지들끼리 모두 행복하고 즐겁다.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러니까 수진이가 수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거다. 지온이처럼 막 살 수는 없어! 하지만 동시에 어린아이를 마음에 품고 사는 어른은 영원히 이 세계에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내가 나에게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먹고는 살아야 하니 여전히 가끔 구걸은 해야겠지만, 자유분방하고 반항기 넘치는 어린아이를 끝까지 품고 저항하며 살아라. 그게 예술가로서 수수진이 가져야 하는 정체성이자 모든 것이다. 굴복하지 마라. 미래에 대한 막연함은 옆집 개의 손에 살짝 쥐여주고, 유명이라는 단어에는 침을 뱉는, 그런 어린 어른으로 살아라. 우리 그렇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