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0121, 무슨 숫자인고 하니, 나의 생년월일이다. 1988년, 바야흐로 서울에서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한 특별한 해, 대한민국 현대사에 길이길이 남을만한 1988년의 첫 번째 달인, 1월에 나는 태어났다. 누구든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태로 세상에 나온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남을 당한다고, 김영민 교수는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라는 책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나 또한 태어남을 당한 사람 중 하나이지만, 그래도 감사한 것은 내가 1988년이라는 각별한 해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1988년에 태어난 유명인으로는 아티스트 권지용이 있다. 그는 1988년 중에서도 8월 18일에 태어나 8이라는 숫자를 본인의 브랜딩에 아주 잘 활용하고 있다. 1988년에 태어난 아기들은 올림픽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당시 사회의 열정과 분위기, 열망 같은 것을 새기고 태어났다. 들뜬 사회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아기들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오묘한 달뜬 감각은 우리만이 공유할 수 있는 정서적인 DNA 같은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2년의 지금은 1988년으로부터 34년이 지난 해다. 그 해에 태어난 아기들은 이제 만으로 서른넷 먹은 사람이 되었고, 1988년 1월 21일에 태어난 아기인 나는 여전히 달뜬 열망을 마음에 문신처럼 새긴 채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열망의 속을 들여다보면, 이런 것들이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은 언젠가 결국엔 바뀐다는 것, 그 변화는 굴렁쇠 소년이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르며 시작되었다. 아주 작은 단위인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변화. 나중에서야 티비를 통해 보았던 장면이지만, 내가 태어난 그 해에 세상은 그렇게 바뀌었다.
나는 요즘 내 나이에 대해 부쩍 자주 생각한다. 어른이 되었다고, 더 이상 어른이 아닌 채로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자고로 어른이란 건, 책임이 따르는 일이기에 나는 요즘 책임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한 명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이 설득의 과정이 매우 자연스럽고 아름다워서 나이를 먹는다는 건 결국 스스로와 깊은 대화를 나누며 설득하고 설득 당하는 과정이라는 깨달음이 있다. 꽤나 할만하다. 어른이 된다는 것, 나이를 먹는다는 것, 불편하거나 두려운 일이 아니다. 깊어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감히 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빨리 오라고, 함께하자고. 하지만 내 말과는 반대로 세상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그거 아닌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이 먹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혹은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은근슬쩍 네게 말할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개인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과, 서른넷의 나이는 책임을 지는 한 인간의 햇수라는 두 개의 사실이 맞닿아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아무리 세상이 이러쿵저러쿵 말해도, 산다는 것, 그러니까 시간마다, 계절마다, 해마다 나이를 조금씩 맛보며 먹는 이 과정이, 너무도 찬란하여 이 아름다운 과정에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곁들이고 싶지 않다. 나에게 인생이란 과제가 아니다. 검사나 평가가 필요하지 않고,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며, 억지로 할 필요도 없다. 나에게 인생이란 정말 맛있는 한 상 차림이라서, 나는 오늘도 하루치의 인생을 먹고, 하루치 자란다. 그렇게 매일 조금씩 자라서 계절마다 뿌리내리고, 새 잎사귀를 터뜨리는 나무처럼 사는 것. 나 한 명 그렇게 사는 것으로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1988년도 서울에서 한 명의 소년이 굴렁쇠를 굴렸던 것처럼 1988년도 1월 21일에 태어난 한 명의 소녀는 인생은 맛있는 한 상 차림 같은 거라고 말하며, 고군분투하며 매일의 삶을 과제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다른 마음가짐으로 살아보자고 제안하며 나의 굴렁쇠를 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