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두가 그렇다. 나만 이렇게 우울한 줄 알았는데 남들도 나만큼 우울하고, 나만 인생이 괴로운 줄 알았는데 무려 우리 엄마도 나만큼 인생이 괴롭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인 거라서 하나도 새삼스럽지가 않아야 하는데, 마주할 때마다 새삼스러운 그런 감각이 존재한다. 우울감, 자괴감, 환멸 이와 비슷한 것. 내가 매번 신에게 물을 때마다 매번 똑같은 답을 얻는 질문이 있는데, 인생은 왜 이렇게 괴로운 겁니까. 물으면 하나님의 아들이자 동등한 분신으로,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본 예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을 살아보니 괴로움투성이더라고. 온갖 질병과 고난과 고통을 보고 겪었으며, 나중엔 정치적인 이유로 결국 사형을 구형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겨우 인생이더라. 오 주여, 인류를 삶이라는 악으로부터 구원하소서.
우리 할아버지는 두월리라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의 농부였다. 성실하셨고, 꼼꼼하셨으며, 배울 점이 많은 분이셨다. 명절마다 고운 한복으로 우리를 맞이하셨던 모습이 진하게 남아있다. 늘 흙투성이인 할머니와는 달리 할아버지에게는 먼지 한 톨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분이 함께 고된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집 안 구석구석 흙이 버적버적한데도, 할머니는 어차피 더러워질 거 청소를 왜 하냐는 주의였고, 반대로 할아버지는 늘 쓸고 닦고 열심이셨다. 성격이 다른 두 분은 서로 티격 대면서도 금슬이 참 좋으셔서 늘 귀여운 커플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근데 우리 할아버지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셨다. 아흔두 살의 연세에 자살이라니, 보통 자살은 비교적 젊은 나이의 인생에 어울리는 죽음 아닌가.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삶의 괴로움을 농약을 들이킴으로 마무리하셨다. 할머니는 그 충격으로 요양 병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생각보다 더 빨리 할아버지의 곁으로 가셨다.
할아버지는 왜 삶을 그렇게 끊어내듯 떠나야 했을까. 마을에서도 참 오래도록 건강히 장수한 어르신이었는데, 무엇이 할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너무 노쇠하셔서 물이 농약인 줄 알고 실수로 들이키셨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실상 할아버지는 뭐든 자주 까먹었고(그러실 분이 아닌데), 사랑하는 가족마저 알아볼 수 없는 치매로부터 역시나 자유롭지 못하셨다. 그러니까 잠깐이라도 정신이 반짝 돌아왔을 때, 바로 그 때, 죽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셨다. 그 선택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고, 원망스럽기까지 하지만, 할아버지가 택하신 방식을 마치 정신이 이상해서 뭘 잘 못 마셨다는 말로는 정리하고 싶지가 않다. 할아버지는 92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보니, 결국 삶에 최선을 다한다는 건, 어쩌면 그것을 적당한 시기에 끊어내는 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할아버지는 단정한 한복 차림 그대로 본인 삶의 존엄성을 지켜내셨다.
큰 고모는 우리 집안에 작가가 있다며 나를 자주 치켜세워주시곤 하는데, 할아버지의 손재주를 닮았다 하신다. 늘 깔끔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엮어내셨던 곶감, 버스도 기차도 없는 깡촌 마을에 사시면서도 늘 채도가 낮은 세련된 색감의 한복 차림, 다 쓴 달력을 하나하나 오려 작은 메모지로 만들어 매사 뭘 깨알같이 적던 습관까지도. 나는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물론 나는 할아버지처럼 차분히 바둑을 두는 조용한 성격을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일부분은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다. 92세의 노인이 깨달은 것처럼 35세의 청년도 매우 비슷한 감각의 고통을 느낀다. 그건 몸이 아파서도 아니고, 인생에 큰 사건 사고가 있어서도 아니고, 그저 존재로부터 온다. 나로부터, 그냥 나라는 존재로부터, 나의 존재와 함께 태어난 고통이라는 감각을 안고 평생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죽음은 아주 두려운 것이고, 웬만하면 피하고 싶지만 언젠가는 삶을 와락 덮칠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의 삶에. 어쩌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이 삶을 괴로운 것으로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큰 소리 내어 울고 싶은데, 눈물도 안 난다. 무엇을 갈망하고 무엇을 바라봐야 할까. 나는 요즘 들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랑도 일도 관계도 그냥 삶이라는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 그래서 삶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기 시작한 것이 눈에 보일락 말락한 개미만 한 구슬을 꿰는 일이다. 매일 몇 시간 동안 작은 구슬을 꿰고, 새로운 구슬을 사들이고, 또 구슬을 꿰고, 아무 생각도 아무 감각도 없이 할 수 있는 단순한 행위를 매일 반복한다. 하지만 정말 웃긴 건, 그렇게 꿰어낸 것들이 알알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가시광선 안에 있는 거라고 과학시간에 분명히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안구를 통해 보는 색깔에는 제한이 있다는 걸 지극히 아는데도, 이미 환상적이다. 이 단순한 반복 안에서 나오는 팔찌와 반지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삶도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갖게 하면서,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결국엔 또 다른 삶에 대한 희망을 낳는다는 지독한 딜레마에 빠진 채로 오늘도 어제와 같이 허우적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