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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초 Aug 09. 2021

옥상 대화

내게 처음 다가와준 키다리아저씨... 가 아니고, 키다리 언니

드림하우스 한 달 차, 첫 번째 간담회를 마쳤다.

한 달 동안 쉐어하우스에 살아보면서 생긴 건의 사항도 얘기하고 각 플랫 (하우스 안에는 크게 5개의 방이 나뉘어져 있는데, 각 방을 '플랫'이라고 부른다. 한 플랫 안에 4-5명의 플랫 메이트들이 산다.)들끼리 많이 친해진 분위기다. 간담회 후 애프터 파티도 참석했다.


이제 21명 정도 앞에서는 떨지 않고 자기소개 정도는 할 필요가 있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각자 지금까지 해온 여러 프로젝트와 지금 하는 일들을 공유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금속 공예 디자이너 ㅂ입니다."

"사진 찍는 ㄷ입니다."

"요리 크리에이터 ㅁ입니다."

"안녕하세요, 새벽의 축구 전문가 ㅍ입니다."

" (싸이코지만 괜찮아) 드라마 촬영 때문에 많이 늦었네요. 드라마 PD ㅊ입니다"  


라고 시작하는 프로들의 대화에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대화에 끼기 쉽지 않았다. 스펙과 능력들이 '엄청난 사람들' 속 그저 학생인 나는 의기소침해지기 십상이었다. 면접 동기 ㅎ 도 있었다. 그런데, ㅎ은 또래가 아니었다. 실물로 보니 엄청난 동안의 미모를 가지고 있는 10살 언니였다 (지금도 매번 언니의 나이를 들을 때마다 새삼 깨닫는다. 크리에이티브하고 젊게 살아서 그런지 언니 오빠들은 모두 동갑내기 친구 같다). 다들 능숙하게 대화도 잘 이끄는 인싸들이었다. 나도 모임 자리에서 꽤나 인싸나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했었는데, 이곳은 '어나더 레벨'이었던 것이다. 인스타 팔로워 수가 1000명이 넘는 인플루언서들도 많았다. 뭔가 여유 넘치는 (안 가봤지만) 대기업 회식 자리 같기도 했다. 각자의 야무진 자기소개가 끝날 때마다 '와......'만 연달아 감탄하며 박수만 치고 있다가 내 차례가 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테크 회사에서 마케팅 인턴하고 있는 조민근입니다. 재키라고 불러주셔도 돼요~"

라고 말해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으, 거기서 영어 이름이 왜 나와...-_-!!'


그 당시 일하고 있던 인턴이 첫 직업이었던 나는 '방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뒤에도 몇 마디 덧붙였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내가 영어를 많이 말했다고 한다. 떨리면 왜 그렇게 영어가 튀어나오는 건지....

22명 자기소개가 다 끝나고 보니 내가 막내였다. 모두 친해지고 싶고 궁금해지는 사람들이었고 벌써 대화만 나누고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심해지는 코로나로 재택근무로 바뀌어 드림 하우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여전히 같이 밥 먹을 하우어를 찾지 못해 자전거를 타고 사 가지고 온 김밥 한 줄로 점심을 때우고 있었던 그때, 나에게 점심 먹었냐고, 안 먹었으면 밥 같이 먹자고 물어보며 먼저 다가와준 언니가 있다. "민근씨, 점심 먹었어요?"

"점심은 먹었고 퇴근하면 같이 저녁 먹어요!" 


첫 입주자 OT 날, '저 언니랑 친해지고 싶다' 하고 생각했던 그 언니다. "안녕하세요, 시각 디자인하고 있는 ㅈ입니다. 매번 물어보셔서 먼저 말씀드리자면 제 키는 175cm이에요." 그녀의 첫 자기소개였다. 뭐야, 이 당돌함은? 이 언니, 멋지잖아? 나도 170cm의 큰 키로 매 학년 교실 뒷자리에 앉기 일쑤였는데 나보다 더 큰 키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모델 같은 언니로부터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나보다 키 큰 한국 여자는 처음이었다(?). 가끔 지나가면서 마주칠 때마다 돋보였던 그녀의 아웃핏은 내 취향을 매번 저격했다. 이 언니는 자기와 찰떡인 깔롱한 영어 이름도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들어보지 못한 간지 나는 영어 이름이다. 에스핀.


하우스 앞 가까운 식당으로 걸어가는 와중에 언니는 키가 비슷해서 좋다고 하며 쉽게 내 팔짱을 꼈다. 벌써 엄청난 쏘울 메이트가 생긴 것 같았다.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언니에 대한 호기심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첫 1:1 대화였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통점이 많아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하고 싶은 일과 프로젝트, 하고 싶은 콘텐츠도 비슷했다. 우리는 그 날밤 하우스로 돌아와 수첩에 같이 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 내려가기도 했다. 언니는 나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나한테 어울릴만한 브랜드, 캐릭터, 분위기, 오브제, 심지어 내 목소리를 파악하고는 잘 부를 것 같은 노래까지 불쑥불쑥 추천해주었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주면서도 나를 모르면 할 수 없는 '개인화 추천'이랄까. 나와 비슷한 취향을 나누는 사람을 만나 내 취향과 아이덴티티가 더욱 깊어지는 건 처음 느껴보는 또 다른 형태의 기쁨이었다.


ㅈ언니와의 첫 끼

ㅈ 언니는 요리에 '요'자도 모르는 나를 안 이후부터 매 끼니마다 "밥 먹었어? 안 먹었으면 (3층 부엌으로) 내려와"라고 시크하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진짜 엄마 같았다. 5층에 사는 나는 신나게 계단을 뛰어 내려와 언니랑 자주 밥을 같이 먹었다. 언니의 어머니가 직접 만드신 택배로 도착한 깻잎 김치와 장아찌는 하우스의 보물이었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직접 맛 보니 언니가 왜 요리를 잘하는지 단 번에 이해가 갔다. 감칠맛 나는 고향의 맛의 그런 보물을 언니는 내게, 아니 나뿐만 아니라 더 많은 하우어들에게 턱턱 내어주며 같이 먹게 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나의 첫 '집밥'이다.


다른 반찬 다 필요없고 깻잎 김치하고 밥만 먹어도 맛있었다! 기억에 남는 밥상


수첩에 언니와 적어 내려 간 프로젝트들 중에 '영어 동화 ASMR 유튜브 영상 찍기'가 있다. 

일사천리로 언니와 하우스 로프트의 스튜디오에서 녹음까지 하며 동업 계획과 일에 대한 가치관도 공유했다. 일상 대화만 나눴던 언니와 진지한 수익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니 어색하기도 했다. 재미와 흥미로 시작한 일이 돈이 오가는 일로 될 수 있기 때문에 선이 확실해진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언니도 깔깔거리고 수다를 떨던 이전 모습과는 달리, 프로답게 모든 걸 문서화 해 기록으로 남겼다. 애매한 걸 확실하게 할 기준을 협의한다. 아이디어의 중요성과 확장성 때문에 원작자의 저작권도 다시 한번 누설되거나 '내 것처럼 말하는' 일도 더 조심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요즘 같은 콘텐츠 홍수 시대에는 콘텐츠 아이디어 싸움인데 언니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서로 즐기면서 멋지게 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런 과정을 잘 일러주고 리드해주는 언니를 만나서 참 감사했다. 어떤 영어 동화책을 읽을지, 어떤 착장을 입고 읽을지, 어떤 컨셉인지, A부터 Z까지 영상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미리 해둔 영상 스케치를 바탕으로 필요한 소품과 장비를 준비한다. 읽기로 한 영어 동화책을 틈틈이 연습한다. 이제 실전. 우리는 생각보다 길어지는 촬영에 당황했다. 밤을 새우면서 촬영을 마쳤고 편집을 해냈다. 영상 하나를 만들어내는데 이렇게 많은 디테일과 노력이 필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어떤 일이든 쉬운 건 없다. 영상만 찍는다고 다가 아니었다.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는 거였기 때문에 그에 맞는 채널 브랜딩도 해야 했다. 브랜드 폰트, 메시지, 로고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Obsscent 옵센트의 첫 영상이 탄생했다. 우리는 또 다른 버킷 리스트가 생겼다. 크리스마스 배경의 영어 동화책을 읽었던 만큼, 눈 오는 겨울, 유럽 (프라하나 코펜하겐)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옵센트의 분위기를 더 가까이 경험해보자고. 


새벽 3시... 머나먼 촬영 왕국...


ㅈ 언니와 나는 새벽에 종종 옥상에 올라갔다. 신세계였다. 옥상을 올라간다는 게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난 그 이후로 드림 하우스 옥상을 자주 찾았다. 언니의 완벽한 선곡 덕분인지는 몰라도 옥상의 매력은 꽤나 짙었다.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이느라 흔치 않은 조용한 연남 동네의 감성을 더 살아내게 했다. 온 세상에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았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위로가 되는 공간이었다. 큰 걱정이나 고민도 옥상에만 오면 그저 별거 아닌 작은 것들이 되었다. 달이 잘 보였고 숨통이 탁 트였다. 옥상에서 나누는 대화는 어떤 주제든 오갔다. 종종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신나게 춤을 추기도 하면서 그 조용한 새벽을 깨기도 했다. 너무 커진 볼륨에 이따금씩 건너편 주택의 아저씨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조용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튀어나오는 웃음을 잡으며 키득키득 웃어댔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기도 했다.


ㅈ 언니와 옥상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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