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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초 Oct 22. 2021

슬기로운 드하 생활

연남동 쉐어하우스 맨 꼭대기 다락방

아마도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플랫 사람들이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눈곱도 안 뗀 민낯은 기본이고, 어떤 치약과 샴푸를 쓰고,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유산균을 먹으며, 샤워할 때는 노래를 부르는지 안 부르는지, 자기 전 주로 하는 스트레칭 동작까지, 나의 생활을 모두 공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드림하우스 꼭대기 층 520 플랫에는 나를 포함해 4명이 산다. 하우스에 처음 입주했을 때는 플랫 언니들과 많이 서먹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먼저 말을 거는 편인데, 언니들은 너무 바빴다. 플랫의 맏언니 ㅈ언니는 하우스에서 마주친 날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바빴던 포토그래퍼이고, 마케팅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둘째 ㅁ 언니 또한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 늦게 지쳐 돌아왔다. 방송국에서 스포츠 중계방송 송출 일을 하고 있는 셋째 ㅇ 언니도 스포츠 중계방송에 그녀의 시간을 맞춰야 했기에 매일 스케줄이 달랐고 보통 저녁을 넘긴 밤이 돼서야 현관문을 여는 '띠띠띠' 소리가 힘겹게 들렸다. 항상 아침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는 언니들은 밥 챙겨 먹고 쉬기 바빴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다. 매일 3층 부엌에 나타나 다른 하우어들과 같이 밥을 먹는 나를 제외하고 보이지 않는 520 하우어들로 우리 플랫은 '유니콘 플랫'이라는 별명이 얻었다. 신비주의 콘셉트가 재밌었지만 사실, 언니들과 더 친해지고 싶은 아쉬운 마음이 컸다. 다른 플랫을 보면 이미 회식 한 번씩 하고 그룹 셀카에 와인 한 병씩 깐 사이(?)가 되어 서로의 방에 스스럼없이 들락날락거린다는데, 우리 언니들은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잠깐 마주칠 때마다 그냥 '밥 챙겨드셨어요?', '오늘은 일 어땠어요?' 하는 안부만 묻기 시작했는데 초면부터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에 어느 순간 그런 질문도 언니들에게는 귀찮게 들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언니들은 항상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그게 더 짠하기도 했다. 언니들이 퇴근할 때면 항상 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 "How was your day?" 하고 물었다. 오늘 하루 어땠는지, 뭐가 힘들었는지, 언니들의 라이프가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본가로 돌아올 때는 침대에 곧바로 몸을 던져 미처 답장을 못한 카톡을 하거나 인스타그램으로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스크롤하기 바빴다. 그런데, 이제 본가가 아닌 드림 하우스로 퇴근할 때는 '같은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하루'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침에 급하게 나갔는데 지각은 안 했는지, 오늘은 어떤 모델과 어떤 콘셉트로 무슨 사진을 찍었는지, 마케팅 프로젝트를 할 때 보스한테 깨지진 않았는지, 방송 송출 일은 어떻게 하는 건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심은 뭐 먹었는지... 누군가의 하루를 묻는 게 오지라퍼일 수 있지만 외국에서는 하나의 안부 인사이지 않나! 그래서, 생뚱맞지만 영어로 묻기 시작했다. 영어에 관심이 많던 ㅇ 언니가 길게 대답을 해주기 시작했다. 쉬고 싶을 텐데도 자연스럽게 플랫에 널브러져 나에게도 내 하루는 어땠는지 물어보며 같이 수다를 떨었다. 방송 시간에 맞춰 일을 하기 때문에 매일 출퇴근 시간이 달랐기 때문에 퇴근하고 돌아온 언니에게 내일 스케줄을 물어보는 게 또 다른 일상이 되기도 했다. 아침에 민낯으로 수줍어하며 눈인사만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사이에서 화장을 지우며 새벽 1-2시까지 수다를 떠는 사이가 되었다. 둘만이 나눌 수 있는 주제가 많아졌다. 연애 상담부터 앞으로 10년 계획까지, 하루는 새벽 4시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각자 방으로 자러 간 날이었다. 그날따라 ㅇ 언니는 언니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를 따라 내 방으로 들어오더니 그대로 내 침대에 폴짝 누웠다. 그러고는 나를 계속 바라보는 언니가 멋쩍어서 "왜~" 하고 둘 다 웃음이 터져 그렇게 수다 시즌 2가 시작되었다. 천장을 덤덤히 바라보던 언니는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너의 열정을 잘 전파하는 것 같아." 한참 뜸을 들이던 언니가 나에게 해준 말. 참 기분 좋은 말이다. 어쩌면 내 재능은 무언가 '하기' 보다 나로 인해 누구든 무엇을 '하게 하기'에 가까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히죽 웃음이 나오는데 옆에 누워있는 언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넌 참 챙겨주고 싶은 아이야. 그리고, 난 그게 싫지 않다? 자기 취향을 알고 그 방향으로 계속해서 파고드는 그 집요함을 배우고 싶어. 기회가 많은 축복받은 아이야. 또, 그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아이니까 그렇겠지? 그걸 참 배우고 싶단 말이지." 살면서 들은 말 중에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아 다이어리에 적어 놓은 멋진 말들이다. 언니는 천장을 보면서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언니를 꼭 안아줬다. 응원과 고마움의 허그였다. 나에 대한 감정을 나에게 표현해주어서 고마웠다. 선배나 언니, 오빠들을 만날 기회가 없던 나는 이렇게 도란도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언니가 언젠가 한 번쯤 내 인생에 나타나 주길 바랬는데 이때가 그 순간이다.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까지 수다 시즌 2를 달려온지라 둘은 좁디좁은 내 삼각 방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하지만, 언니의 방이 너무 가까이 붙어있는지라 언니는 내가 잠들면 언니 방으로 살금살금 돌아가곤 했다.


옥상에서 우리



모든 드림하우스 하우어는 10월부터 4월까지 최소 6개월을 계약하고, 4월에 한 번 더 6개월을 연장해 10월까지 살 수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나는 학교를 마치러 여름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번 더 재계약을 못하고 나만 하우어들과 헤어져야 할 생각을 하니 또 우울해졌다. 조금 이른 이별을 나 혼자 해야 했던 게 그렇게도 서럽던가. 그날 밤 잠이 안 왔다. 잠 잘 오는 노래 플레이 리스트도 들어보고 새벽 명상을 해보기도 했다. 여전히 천장만 보며 눈을 껌뻑이고 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잠옷바람에 옥상으로 올라가 보았다. 그냥 그렇게 2월의 늦겨울 매서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서있고 싶었다. 앞으로의 모든 변화, 그리고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성큼 다가왔다. 이전의 나는 새로운 환경에 놓이는 일에 두려움이 없었다. 이제는 어디론가 떠나는 걸 주저하게 된다. 그만큼 지금이 매우 안정적이고 좋다는 뜻이겠지. 현재의 좋은 순간들이 알지 못하는 미래 때문에 변하는 게 싫었다. 새벽 4시에 옥상에 올라갔다가 조용히 현관문을 닫는다고 닫았는데 들어오는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옆 방 ㅁ 언니는 방에서 나와 아무 말도 없이 나에게 쪽지 한 장을 스윽 쥐어 주고 간다. 그 늦은 시각 누가 깨어 있는 줄 모르고 눈물범벅이 돼서 그대로 들어온 나는 당황 그 자체였다. 이렇게 언니로부터 위로의 쪽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도 그냥 슬펐다. (생각이 많아 의미 부여하기를 좋아하는 MBTI의 F 인 게 드러나는 순간인 건가...) 쪽지를 읽고는 몇 번을 더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12시가 넘은 기상 시간, 퉁퉁 부은 눈은 반만 떠졌다. 평소와 달리, 방에서 나오지 않고 침대에서 멍 때리며 누워 있다. '이 퉁퉁 부은 눈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야 하나'하는 생각도 했다. 그 순간, 똑똑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야, 그렇게 쳐져 있지만 말고 이 도넛 좀 먹으러 나와봐!" 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린다. ㅁ 언니다. 언니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다. 퉁퉁 부은 눈을 머리로 최대한 가린 채 플랫 거실로 슬그머니 나갔는데 도넛을 건네며 해맑게 웃고 있는 언니 얼굴이 보인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그냥 눈물이 쏟아져 나와버렸다. "언니...(엉엉) 나 재계약 못해 (엉엉). 미국 다시 돌아가야 해 (엉엉). 이렇게 거실에서 언니랑 도넛 노나 먹는 것도 엄청 그리울 것 같단 말이야 (엉엉)" 지금 생각하면 엄청 웃픈 일이다. 이미 눈이 퉁퉁 부어있다 못해 한 방 맞은 것 같은 얘가 방에서 나오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하니 ㅁ 언니도 참으로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심지어, 그때는 ㅁ 언니가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플랫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그 며칠 안됬을 서먹한 때였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언니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내 울음을 다 받아내 주었다. "야~ 나 미국 진짜 갈 거야! 너 나 못 믿어? 미국에서 만나면 되지, 뭘 그러냐~" 쿨한 ㅁ 언니... 그건 맞는데... 망할 코로나 때문에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누가 아냐고......


이렇게 사람이 감정적이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도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이 내게 머물러있었다. 하우어 언니 오빠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 이렇게 멋진 사람들이 내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너무나 감사한데 생각보다 빨리 떠나게 된다는 걸 알게 되니까 더 속상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날 중 하나였는데 오늘은 쏟아지는 잠을 붙잡고 나를 진심으로 챙겨주며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날이었다. 내 무릎을 토닥여주고 우는 소리를 덮어줄 음악 볼륨을 키우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남의 일에 이렇게까지 시간과 에너지를 써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그들은 "이게 어떻게 남의 일이야. 네가 울적하면 우리도 울적해." 한다. 끊임없이 정이 오간 이 관계들이 이제는 지금보다 못하게 시들어갈 거라는 사실이 싫었다. "슬프고 아쉽지 않은 이별이 아닌 게 더 슬플지도 몰라." 하는 말을 툭 던졌다. 신기하게도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 다음의 만남을 함께 계획하는 사이가 되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이별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2020년 10월 22일, 작년 오늘, 하우어들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1년의 계약 종료 시점인 오늘 하우어들은 이삿짐을 싸고 하우스 앞에는 이삿짐 트럭이 매일 오가고 있다. 카카오톡 단체 톡방에 한 명씩 작별 문자를 보내오면 입술이 삐죽삐죽 거리며 마음이 복잡해진다. 한 명 한 명 안아주고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은데 한 명씩 떠나가는 모습을 머나먼 시카고에서 지켜보고만 있다. 올해 4월, 재계약을 못하고 퇴소한 뒤로 520 플랫에는 새로운 하우어 막내가 왔다. 나와 동갑인 ㅎ이었다. 타이밍 한 번 야속하다. 동갑인 친구와 하우스에 같이 살아간다는 건 어땠을까. 시카고로 출국하기 전 ㅎ 이를 만났을 때는 오래 알아왔던 친구처럼 나도 모르게 ㅎ를 대하는 제스처가 너무나 편해졌다. 두 번째 만남에서 찐친이 아니면 보여주지 못할 모습들이 다 공개되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언니 오빠들은 ㅎ이와 잘 못 지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했다. ㅎ이만의 개성 있는 삶도,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열정도 단 번에 느낀 친구로서 백 퍼센트 동의했다. 이로서 새로운 520을 뉴 이공이라고 칭하며 뉴이공 플랫은 시카고로도 자주 전화를 걸어주었다. 그저 많이 보고 싶다고 말해주면서. 영상 통화 너머로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와 깜깜한 새벽 홀로 켜졌을 하우스 3층 부엌의 조명, 안 먹고는 못 배길 야식 냄새와 함께 고조되는 흥분된 공기가 그리워졌다. 드림 하우스 2기 22명 하우어가 만들어가는 드림하우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못다 한 이야기도, 다 쓰지 못한 글도 아직 많이 쌓여있다. 좋은 것, 맛있는 것을 보면 자꾸만 생각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만나는 날이 벌써 기다려지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시작을, 그들만의 미래를 어떻게 꾸며나가고 있을지 벌써 궁금해지며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 씩 웃어지는 밤이다.



<드림 하우스에서 처음이었던 것 (feat. 알코올 냄새)>

- 새벽 연남동 산책

- 새벽 드라이브

- (놀랍게도) 야식

- 크리스마스 때 소주병으로 트리 만들기

- 소주 10병 한꺼번에 사 오기 

- 옥상 파티

- 옥상 요가

- 옥상 크라잉

- 뱅쇼 마셔보기

- 와인 테이스팅과 함께하는 딥 토크

- 닭발 먹어보기

- 하우어들이랑 술 게임하다가 아침 7시에 잠들기

- 언니 오빠들 앞에서 울기 ㅋ

- 각 잡고 촬영하기

- 별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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