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만날 순 없지만, 우리에게 처음 찾아와 준 너의 이야기 4
[2018년 9월의 일기]
9/9
어젯밤부터 속옷에 피가 보이고 배가 아파서 일요일 아침 일찍 산부인과에 갔다. 응급실 당직 선생님께서 진찰해 주셨는데 한참을 아무 말씀 없이 옅은 탄식을 보이시길래 무슨 문제가 있나요 물어봤다. 내 무릎을 쓰다듬어 위로해 주시면서 아가가 유산되었다고.. 전해주셨다. 믿을 수 없었다. 나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진료복을 환복 하러 탈의실에 들어간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금요일부터 몸이 이상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에 대해서 시뮬레이션해보느라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온정이가 무사하다면 정말 좋겠지만, 저희와 온정이에게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달라고.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당직 선생님이 계류유산의 경우 소파수술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오후에 공복인 상태로 다시 오거나 내일 담당의에게 수술을 받으라고 하셨다. 당장은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일단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남편이 운전하는 내내 차 안은 나의 울음소리로만 가득 찼다.
집에 도착해 부모님께 소식을 전했다. 부모님께서는 내일 담당선생님 진료를 다시 보고 수술하는 것이 좋겠다 하셔서, 오늘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집에서 쉬기로 하고 남편과 돌아왔다.
집에 와서 쉴 준비를 하는데 제주도 어머님에게 전화가 왔다. 어제 통화할 때 할아버님이 많이 위독하시다고 하셨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전화 온 적이 없어 불길했다. 남편의 할아버지, 105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9월 9일 10시 45분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할아버지의 소천소식을 다급하게 전해주시는 어머님께 우리는 어려운 말을 꺼내야 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어머님의 목소리의 떨림과 절박함이 전화기 밖까지 전해졌다. 그렇게, 온정이와 할아버지의 죽음을 우린 한날한시에 듣고 말았다.
월요일까지 기다렸다가 담당의에게 수술을 받기로 얘기가 되었기 때문에 남편은 급하게 할아버지 입관예배를 위해 제주도로 갔다. 갔다가 다시 늦은 밤에 올라와, 내일 수술에 함께 해주기로 하였다. 집에서 혼자 쉬는데 그렇게 이상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정말 슬픈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 같아서 미뤄두었던 집안일을 조금씩 했는데, 설거지를 하다가도 눈물이 주르륵, 침대에 앉아있다가도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부지불식간에 슬픔이 찾아왔다. 교회에서 부모님이 돌아오시는 시간에 맞춰 부모님 댁으로 갔다. 그런데 저녁 6시부터 배가 심상치 않았다. 전에는 없었던 복통이 주기적으로 있고 피가 더 나오기 시작했다. 10시가 되도록 참아보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서 의사인 친구 현진이에게 전화해서 몇 가지를 물어본 뒤, 다니던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엄청 빠른 속도로 갔는데 밑에서 뭔가가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계속 들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응급실에 도착했고, 상태를 보신 선생님이 일단은 공복시간이 얼마 안 되어 입원을 해서 상황을 지켜보다 새벽 2시는 넘어야 수술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입원실에 누워 수액과 진통제를 맞는데, 진통이 점점 심해지고 간격이 짧아진다. 아이 낳는 고통은 이보다 10배는 심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제주도에서 돌아올 때까지는 버텨줘야, 수면마취 전에 남편 얼굴은 한번 보고 들어갈 텐데... 하는 생각만 들었다. 의사 선생님이 태아가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나오면 바로 수술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입원실에서 주기적인 진통을 견디고 있었다. 진통은 생리통 보다도 훨씬 강력했는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심하던 진통이 갑자기 멎었고 잠에 아주 잠깐 들 수 있을 정도로 잠잠해졌다. 그러던 중, 아주 짧은 진통과 함께 무엇이 쑥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량의 출혈이 있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일단 아이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침상에서 잠깐 일어선 순간 또 무언가가 나왔다. 2cm가 될까 말까 하는 태아가 나온 듯했다. (나중에 생각날까 봐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그 길로 나는 결국 남편을 만나지 못한 채 진료실(수술실)로 향했다. 수술은 마취를 했기에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낮에 한번 와봤던 진료실이었기에 남들처럼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는 대신 익숙하고 차분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감사했다. 이런 것 까지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걸까?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입원실로 돌아왔고, 몇 분 후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간단한 수술만 했을 뿐인데 진통과 같은 고통은 말끔히 사라졌고, 2cm도 안 되는 태아와 아가집만이 빠져나갔지만 배 속이 비어있는 듯한 가벼움도 느껴졌다. 정말로 온정이가 우리 곁을, 나의 배 속에서 떠났다. 수액과 영양제를 맞으며, 우리는 긴 새벽 동안 둘만의 시간을 갖고 곤히 잠들었다.
할아버지 장례를 모두 마치고 남편이 서울로 돌아와 오늘 하루 동안(9/12)은 둘이서 온전히 시간을 보냈다. 집에서 남편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낮잠도 자고, 영화도 보고, 짧게는 산책도 다녀오고. 또 새벽묵상이었던 시편 111편 말씀과 찬양을 부르며 온정 이를 보내주는 예배를 드렸다.
God has better plans. 태초부터 영원까지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우리를 향한 계획을 믿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에게 필요한 고난과 기회와 시간들을 주실 것이라고. 물론 문득문득 먼저 떠나버린 온정이가 생각나서 힘들지만, 그래도 이 힘든 시간을 통해서 삶에 대한 우리의 지평이, 우리의 신앙이 조금씩 성장하기를 소망한다.
You've gained an angel watching over you. 두 달 동안 우리 가족에게 큰 행복을 주었던 온정이가, 먼저 하나님 곁으로 갔다. 하나님 곁에서 우리 둘을 바라보며, 우리를 늘 응원해 주었으면 좋겠다.
만나서 반가웠어! 우리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