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망레터
나는 수요일마다 초등학교 1학년 남자애의 과외 선생님이 된다. 남자애의 이름은 진혁이고, 내가 가르치는 과목은 국어와 영어다. 1시간 짜리 수업을 하러 수요일마다 편도 1시간 넘게 걸리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심지어 그 집은 어마무시한 언덕길에 위치한 빌라다. 날씨가 좋더라도 힘든 길일 판에, 이상하게도 과외가는 날마다 날씨가 험상궃다. 핸드폰이 지잉-하고 울려서 보면 ‘폭설 주의보’ 또는 ‘폭우 주의보’ 경고 둘 중 하나다. 최근엔 2주 연속 수요일마다 폭설 주의보가 뜨고 있다. ‘아 오늘은 미룰까…’ 하는 마음이 굴뚝같지만, 날씨 좋은 날을 고르다가는 수업을 할 날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눈 쌓인 언덕길을 살금살금 오른다. 몇 번 미끄러질 뻔하며 과외집에 도착하니 진혁의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주고, 진혁이가 소리를 지르며 날 맞아준다. 그 목소리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을 잠시 느낀다. 국어 과외는 오늘의 단어들을 배우고 그걸 응용하고, 단어 게임도 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진혁이의 머릿속에서 굴려지는 단어들은 어른이 굴리는 것과는 다르다. 나 같은 어른은 생각이 너무 정형화돼있는데 어린이는 가끔 보면 시인같다. 그가 조잘대는 말을 들으면 세속에 물든 귀를 씻고 맑아진 기분이다.
장난꾸러기 진혁이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의자에서 꿈틀댄다. 몸을 동글게 말고, 두 발을 책상 위에 올리고, 갑자기 교재에 그림을 그린다. 그런 진혁이를 가만히 진정시키는 게 내 일이다. 진혁이는 가끔 자신이 모은 포켓몬 카드들을 보여주며 내게 귓속말을 한다. “사실 저 엄청 부자예요.” 영어 시간에 받아쓰기를 할 때는 쉬운 단어만 내달라고 떼를 쓴다.
그런 진혁이가 가끔 허를 찌르는 날이 있다. 언제는 교재에 남한과 북한 단어가 나오길래 ‘북한’에 대해서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이 생활하는 한 나라였는데 서로 싸우고 갈라지게 되었다고. 그는 물었다.
“왜 싸웠어요?”
“미국인은 우리 나라 올 수 있는데 왜 북한은 여행을 못와요?”
같은 심오한 질문엔 잠깐 할말을 잃기도 했다.
오늘 국어 시간엔 ‘특징’이라는 단어를 가르쳤다.
“진혁아, 너가 다른 친구들과 다른 특징은 뭐야?”
“음… 저는 스키를 잘 타요! 학교 복도에서 이렇게 이렇게!”
벌떡 일어나 스케이트타는 시늉을 하는 진혁이한테 나는 작은 소리로 정정하지만 (“그건 스케이트 아닐까?”) 그는 내 말을 깔끔히 무시한다.
“진혁아. 그럼 아빠의 특징은 뭐라고 생각해?”
“아빠는 방구를 잘 싸요!”
뜻밖의 집안 대소사를 듣게 된 나는 당황해서 웃고 만다. 그래. 방구 잘 뀌고 똥 잘 싸는 것도 특징이 될 수 있구나. 아이의 눈으로 보는 사람의 본질은 그렇게 말랑말랑하고 원초적인 것이었다. 눈이 많이 와서 싫지 않냐고 하면, 눈싸움을 할 수 있어 재밌다고 하는 아이. 그를 가르친지 반 년이 넘었는데, 언젠가부턴 과외로 돈버는 것 이상의 가치를 얻는 것 같다. 평소에 볼 일 없던 8살 어린이와 교류를 하며 시야가 넓어져간다. 사소한 것에서 재미를 얻는 천진함을 배운다.
이렇게 거리가 멀어도, 날씨가 험해도 매주 가는 보람이 있다고. 과외 시간이 끝나면 진혁이는 “끝났다!” 환호를 지르며 제 부모에게 달려가고, 나는 부모님에게 진혁의 학습 상황에 대해 잠깐의 브리핑을 한다. 방구를 잘 싸는 진혁의 아빠 앞에선 조금 웃음이 나오려하지만 참는다. 과외를 끝내고 집에 가는 길. 이 폭설에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가니 그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기어이 길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만다.
콰-당!
나도 진혁이처럼 눈 위에서 스키를 잘 타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툴툴 털고 일어선다.
▼잔망레터 구독
https://janmang.stibee.com/subscribe/
. #강민정 #잔망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과외 #아이 #어린이 #동심 #에세이 #에세이레터 #뉴스레터 #잔망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