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망 Mar 26. 2024

곱슬머리 걔

일상 에세이



 “어, 민정. 너 파마했어?” 친구가 지나가며 한 말에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웬 시비야?” 성격 좋은 친구가 웃어주길래 나도 같이 웃고 말았지만 한편 씁쓸해졌다. 넌 나를 몇 년 봤는데 아직도 내 곱슬머리를 모르니.




 내게 곱슬머리는 콤플렉스 그 이상이다. 태초에 존재부터 잘못되었다는 감각, 똘똘 뭉친 원한이자 선대로부터 내려온 저주. 기왕 곱슬머리로 태어날 거 서양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멋졌을까? 거긴 곱슬머리 인구가 많으니까 하나도 튈 일이 없는데. 하필 직모가 대부분인 동양, 한국에서 태어나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와야 했다. 그래, 이 모든 게 곱슬머리 탓이다. 7살 때쯤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내 머리카락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평소에도 잔머리가 미친듯이 구불거리며 부풀어올랐다. 습기찬 날에는 머리가 방방 떠서는 정전기가 바짝 오른 먼지 더미 같았다. 엄마가 내 머리를 단정히 묶어주려 노력했지만 잔머리는 가릴 수 없었다.



 머리도 단정하게 안되는데 방 정리는 해서 뭐해? 청소를 잘 안하는 성향도 모두 머리 탓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애들과 잘 못 어울린 적이 있는데 그것도 모두 머리 때문 같았다. 10살이 되자 해리포터 소설책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내 별명은 ‘해그리드’가 되었다. ‘헤르미온느’라 불러주는 애들에겐 감사할 지경이었다. (나중에는 사극 드라마 제목인 ‘추노’가 되었다.)

 


 사춘기가 되자 스트레스는 심해졌다. 사람에겐 ‘머리빨’이란 게 중요한데 나는 오히려 머리가 날 깎아먹었다. 얼굴 본판에 비해 굽실거리고 추한 머리 때문에 적어도 50점은 깎아먹었다. 거울을 보면 너무나 이상해보여서 치가 떨렸다. 연예인 중에도 곱슬 머리는 거의 없었다. 곱슬머리를 가진 사람은 예쁠 수가 없으니까.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가진 애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나는 항상 작아지고 부끄러울 뿐이었다. 남자애들은 내 머리를 잡아당기며 놀리기도 했다. 남들에게 항상 ‘곱슬머리 걔’라는 고유명사로 통용되었으니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나머지 장점과 특징들을 다 지우고 곱슬이라는 특질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 나는 슬픔에 떨었다.




 물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펴는 매직 시술은 여러 번 받았다. 웬걸, 이틀만에 원상복구됐다. 지독한 곱슬 놈은 바이러스보다 끈질겨서 돈만 수십 만원 날렸다. 미용실에 가면 항상 타박을 들었다. "어머, 손님. 머릿결 관리 너무 못하셨다. 매직해보는 게 어때요?" 내가 안해봤겠어요? 라고 대답하진 않고 대충 얼버무렸다. 이판사판으로 바를 수 있는 모든 헤어 제품을 다 써보고 대학생 땐 생머리 가발까지 써봤으나 너무 번거롭고 티가 많이 났기 때문에 실패로 남았다. 가발을 써본 며칠 동안은 두피가 근질거리고 다 들킬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웃기기도 했다. 우주도 가는 과학 기술은 왜 곱슬머리는 고치지 못하는가? 우주보다 심오한 게 곱슬 유전자인가? 구불거리는 머리가 내 인생에 펼쳐질 굴곡을 암시하는 것 같아서 만질 때마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왜 나는 남들과 다를까 생각하다보면 곱슬 유전자를 물려준 아빠가 원망스러웠고, 계속 위로 거슬러갔다. 할머니, 증조부모, 그 윗대 선조들. 나는 곱슬 유전자의 시초가 누구였는지 족보를 뒤져서 찾아내고 싶었다. 그 사람을 반드시 저주하리라.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에서 건너온 누군가였을 수도 있었다. 그 사람은 왜 한국에 와서 자손을 낳고 나를 이렇게 고통받게 했지?

 

 


 그 이후의 내 삶은 곱슬머리에 대해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익혀가는 세월이었다. 30대 초반쯤이 되어서야 겨우 외모에 대해 놓게 되었다. 아무리 해봐도 안되는 것에 대해, 이미 주어진 유전자에 대해 원망을 붙들고 있느라 지쳐버린 것이다. 손을 놓으니까 마음이 편해진다. 여전히 방바닥에 나뒹구는 머리카락들을 보면 진저리를 치긴 하지만, 싫은 것도 품어야 하는 게 인생이겠지. 기분 탓인지, 곱슬머리 인물들을 미디어에서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아직도 <모아나> 밖에 생각이 잘 안나긴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훌라 댄스를 추기 시작하면서 좀더 진정된 것도 있다.  손짓과 허리를 살랑거리며 춤을 출 때면 하와이의 건강한 곱슬 소녀를 상상한다. 어느 먼 곳의 바다, 구불거리는 물결을 생각하며 나를 진정시켜본다. 






--------------------------------------------------------------------------------------------------------


+ 여러분의 콤플렉스는 뭔가요? :)  - 남들에겐 없고 내게만 있는 것, 나를 작아지게 하는 것, 생각하면 짜증나고 화나고 억울한 것 - 또는, 좋아하는 곱슬머리 캐릭터가 있나요? 


+제 곱슬머리는 사진보다 심하답니다. 잘 가리고 에센스 바르고 다니는 것 ... ㅎㅎㅎ  



▼월간 에세이레터 구독 

https://janmang.stibee.com/subscribe/





#잔망레터  #잔망 #강민정 #프리랜서 #작가 #카피라이터 #곱슬머리 #곱슬 #머리 #콤플렉스 #컴플렉스 #모아나 #에세이 #글쓰기 #글 #일상 #미용실 #뉴스레터 




작가의 이전글 민속학개론 과제 : 삼각산 도당제 굿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