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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Oct 26. 2024

방 정리 안 한다고 죽나요

소화되지 않는 것들



대학 때는 모두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철마다 유행템이 있었는데, 어디서 공동구매라도 한 것처럼 컬러 스키니진에 테니스 스커트, 둥근 카라 원피스나 블라우스를 많이 입었다. (국문과는 옷에 관심 없을 거란 말은 편견이다.) 중간고사 기간에만 예의상 살짝 추레해졌다. 시험공부가 지겨워질 때면 경영학도들처럼 어떤 사업이 잘될 것인지 얘기를 나눴다. 한 동기는 교문 앞 버블티 가게를 예로 들며 아쉬워했다. 


“내가 먼저 버블티를 국내에 들여왔으면 지금쯤 떼부자 됐을 건데.” 

“그럼 난 스타벅스를 들여왔다.” 


다른 동기는 패션 사업은 어떠냐고 했다. 

“옷을 대여해주는 앱 어때? 옷을 1주일 입고 반납하고 또 빌릴 수 있는 거야.” 


신박한데…? 그럼 리사이클 브랜드로서 환경에도 좋겠다. 내가 쇼핑몰을 열면, 너는 모델을 하고 얘는 상세 페이지를 쓰고 쟤는 물류를 담당하고 이렇게 역할놀이를 해봤다. 그때라도 시도를 해봤으면 시장의 선발주자 퍼스트 펭귄으로서 괜찮았을 텐데. 우리의 문제는 말만 하고 시도를 안 한다는 데 있었다. 다른 모든 것에서도 그렇듯이. 아무튼 나는 사업 구상까지 참여할 만큼 옷에 관심이 많았다. 엄마는 왜 똑같은 옷을 사냐고 했지만 뭘 모르는 소리였다. 옷마다 색과 디테일이 얼마나 다른지, 계절마다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옷은 사대면서 방 정리는 잘 안 했다. TV에 나올 정도로 심한 건 절대 아니지만, 옷과 책들을 좀 쌓아두는 편이었다. 화장대나 선반에 영양제, 과자 봉지, 어디서 받아온 명함이나 스티커, 뭔가의 부스러기, 낙서를 끄적인 이면지 등이 놓였다. 문제는 그걸 보고 ‘더럽다’고 잘 느끼지 못한다는 거다. 내 눈에 거슬리지 않으니 누가 내 방을 보고 난리 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청결에 대한 역치가 낮은 걸까. 


일평생 엄마는 내방을 돼지우리라며 혼을 냈고 나는 라이프스타일을 주장하며 ‘인간미가 느껴지는 방’을 사수했다. “방 정리 안 한다고 죽어?” 내가 말하면 엄마는 “그래 죽는다! 너 이러면 결혼도 못 하고 모두가 널 미워해!”라고 했다… 그런 말들을 무시했지만 마음 깊은 곳 수치심은 남았다. 




20대 후반, 자취를 시작하고 광명을 찾았다. 진정한 자유, 어지를 권리를 얻은 것이다! 해방감에 젖어 사들인 옷과 책들로 방은 포화 상태가 됐다. 터질듯한 옷장은 한쪽 문을 열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다신 안 사야지’ 다짐도 그때뿐, 쇼핑몰 통합 앱이 나온 후로 쇼핑은 더 쉬워지고 억제하기엔 힘들었다. 취향에 맞는 브랜드와 모델들을 보면 홀리고야 말았고, 꼭 저걸 사야 될 것 같았다. 집착을 어떻게 놓을 수 있는 건지 잘 몰랐다. 



일 외에 나머진 신경 못 쓰는 스티브 잡스라도 되는 것처럼, 실리콘밸리 개발자인 것처럼, 시간에 쫓겨 사느라 정리에 쓸 시간은 항상 없었다. 그래도 이사 때나 반년에 한 번씩은 ‘대 정리’의 시간을 가진다. 이걸 언제, 누가 다 샀지? 돈이 얼마야…? 소리를 추임새로 넣으며. 이삿짐 아저씨들도 여자 혼자 사는 자취집 짐이 트럭 한 대를 넘어간다고, 아주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때만큼 타인이 내 치부를 샅샅이 들춰내는 때도 없다. 물론 이사 전문가들은 프로니까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내게도, 지구에도 이건 투머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계절은 점점 짧아지고 기존 옷들도 다 못 입는다. 가을 트렌치코트는 일 년에 며칠도 못 입고, 잠깐 예쁘고 멋진 순간을 위해 많은 것이 낭비된다. 요즘 전 세계인들이 연평균 약 800억 벌의 옷을 산다는데 나도 일조하는 셈. 



옷을 처리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의류 수거함에 버리기, 중고로 팔기, 아름다운 가게에 갖다주기. 남이 안 입는 옷은 다른 사람도 입기 싫을 테니 결국은 쓰레기장으로 갈 확률이 높겠지. 그런 옷들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된다. 가죽, 폴리에스터, 비닐, 울, 면, 실크 등으로 이뤄진. 어떤 건 시간이 오래 흘러도 분해되지 않는다. 


연간 탄소 배출량의 10%가 패션 산업에서 나온다. 버려도 재활용이 잘 안되고 불태워도 타지 않는 ‘의류의 산’으로 변신할 것이다. 이 산은 거처만 달리하면서 옮겨 다닐 뿐 연소되지 않고 계속 채워진다. 여러 옷감의 미래는 그런 것이다. ‘패스트패션’으로 발생된 옷 무더기들, 쓰레기 산과 탄소를 지구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방 정리도 못 하는데 지구 정리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저번엔 <아기공룡 둘리와 얼음별 대모험>이라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재개봉하길래 다시 보았다. 보는 내내 추억이 몽글몽글 떠올라 웃으면서 봤다. 어린이용인 줄만 알았는데, 꽤 의미심장한 장면도 있어 깨달음을 주었다. 우주 쓰레기가 심각하다며 “쓰레기 좀 줄이세요!”라고 관객에게 일갈하는 도우너의 씬도 있다. 애초에 둘리가 갇힌 빙산도 환경 문제를 연상시키고 말이다. 어른이 된 나는 만화를 보며 뜨끔했다. 1996년 개봉한 작품에서 생활 쓰레기 문제를 이미 진단했으며 더 심해질 거라 예측했던 것이다. 



‘방 정리 안 한다고 죽냐’고 반박했었는데, 정말로 언젠가 쓰레기 산에 깔려 죽을 수도 있겠다. 태워대는 연기 때문에 기관지가 안 좋아질 수 있겠다. 여기서 더 쓰레기가 늘어나면 인류의 멸망으로 나아갈 수도… 위기의식이 생긴다. 방도, 나도 가벼워져야겠다. 소유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싶다. 다음 달부터는 진짜로. 생각하다 보니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 쇼핑몰 통합 앱을 차마 지우진 못해도 쇼핑 빈도는 확 줄었다. 계획적인 소비를 추구하며 옷에 할당된 금액도 꽤 줄였다.



근데 짐은 줄더라도 적당히 어질러진 방은 내 라이프스타일이다. 너무 뭐라고 좀 안 하면 좋겠다. 안 혼내면 알아서 집착을 줄이려 하고, 알아서 나와 지구를 위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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