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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지원 May 12. 2022

포도원 너머의 잃어버린 그 여름

[이탈리아 소설클럽①] 체사레 파베세 <달과 불>

체사레 파베세 <달과 불 La luna e i falo>

- 포도원 너머의 잃어버린 그 여름


베네치아에서 서쪽으로 계속 차를 몰아가고 있었다. 파도바와 비첸차를 거쳐 베로나를 넘어서고, 가르다 호수를 지난 뒤 크레모나 쪽으로 내려오면 그때부터는 포(Po) 강 유역이다. 이제부터는 강줄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연신 덜컹거리는 렌터카를 간신히 달래며 천천히 서북쪽으로 방향을 잡다보면 야트막한 구릉들이 줄지어 늘어선 작은 마을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아스티, 알바, 라 모라, 몬포르테 달바와 코스틸리오레. 이탈리아 반도의 서북쪽 끝 - 안개와 포도밭, 구릉과 개암나무들, 산딸기와 소나무 숲, 파르티잔과 대문호들의 땅 피에몬테(Piemonte)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한때는 피에몬테하면 그저 토리노가 전부라고 생각했다. 전체가 대리석으로 휘감긴 클래식한 도시. 치솟은 왕궁과 장대한 궁전들, 까다로운 미식가들, 그리고 커피와 초콜릿, 최고급 와인들이 쏟아지는 백작부인같은 이미지의 코스모폴리탄. 들끓는 태양과 달콤한 칸초네, 열병과도 같은 정열, 진한 에스프레소와 새빨간 토마토로 대표되는 어떤 스테레오 타입화된 이탈리아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장소. 느릿한 말투와 윤후한 성품, 프랑스도 이탈리아도 아닌 독특하고 깊은 식문화. 열어놓고 두 시간 넘게 기도하는 자세로 기다려야만 하는 복잡하고 무거운 이 지역의 와인들처럼 깊은 지성과 고요한 품위를 지닌 도시. 그래서일까. 토리노는 20세기 이탈리아 문단을 대표하는 기라성같은 작가들을 수도 없이 배출해냈다. 움베르토 에코, 이탈로 칼비노, 카를로 레비, 나탈리아 긴즈부르그. 그리고 무엇보다도 체사레 파베세(Cesare Pavese, 1908-1950).



깡마른 체형과 퀭한 시선, 신경증을 달고 살 것만 같은 짙은 염세의 분위기. 그러면서도 묘하게 뒤로 깔린 투명한 순수의 그림자들. 파베세는 어느 누구에게나 강렬한 첫 인상을 던져다 주는 작가다. 처음엔 두 편의 시집으로 그를 읽기 시작했다 - '피곤한 노동'과 '냉담의 시'. 침울한 염세의 정조와 달콤한 밤(dolce notte)이 주는 몽환적 환상이 뒤섞인 그의 시는 토리노의 밤거리를 헤매다 들어간 텅 빈 대리석 카페의 짙고 우아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연상케한다. 항상 죽음과 밤, 실연과 이별, 고통과 단절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잘 직조된 실크 스카프마냥 유려한 품위를 잃지 않는 것도 그만의 매력이다. 끊임없이 존재의 주변을 부유(浮游)하는 듯한 태도, 세상과 엇갈리듯 부딛히고 물러서면 다가오는 특유의 묘한 이물감은 오히려 독자에게 강한 삶에의 열정을 불러 일으킨다. 


밤도 당신을 닮았다.

깊은 가슴 속에서
소리없이 우는 머나먼 밤,

피곤한 별들이 지나간다.

빰이 뺨에 닿는다 -
차가운 전율이다. 누군가는

당신 안에서, 당신의 열기 안에서

길을 잃고 홀로 발버둥치고 탄원한다.

('당신이 잠든 밤' 중에서, 1950)


그러다 파베세의 소설도 읽게 되었다. 평생을 토리노 한복판에서만 살았을 것 같은 작가지만 소설과 산문의 대부분은 언덕과 논밭, 송아지 농장과 밤나무 가득한 피에몬테의 시골마을이 배경이다. 10대의 유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던 작가의 직접 체험이 바탕이 되었다고들 하는데, 실제로 언어는 정밀하고 묘사는 섬세하다. 그러나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풍광들이다. 이 미묘한 비현실감이 그의 문학에 영험한 신비를 부여한다. 


“나는 하얗게 마른 흙과 짓눌리고 미끄러운 오솔길의 풀, 햇살 아래 벌써 단물이 밴 포도 냄새를 풍기는 수확철 포도밭과 언덕의 거친 냄새를 가려낼 수 있었다. 하늘에는 바람의 기다란 선들, 밤의 어둠 속 별들 너머로 보이곤 하는 희끄무레한 얼룩 같은 것이 흩어져 있었다. 내일이면 나는 코르시카 거리에 있겠지 하고 생각한 순간, 바다에도 조류의 선들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 구름과 은하수를 바라보던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내가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과 불> 중에서)



기왕 피에몬테에 왔으니 와인이나 몇 병 사 돌아갈 참이었다. 아스티 마을에서 남서로 방향을 돌려 바르바레스코와 바롤로로 내려갔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와인을 만드는 곳이라지만 분위기는 고요하고 소박하다. 비탈진 경사를 끼고 돌며 형성된 마을에는 이날도 안개가 자욱했다. '네비아’(Nebbia, 안개)하면 롬바르디아 주의 밀라노가 가장 악명 높지만, 그곳의 안개가 일종의 산업적 재해에 가깝다면 랑게와 몬페라토 언덕을 휘감아 도는 피에몬테의 안개에는 일종의 신화적인 힘이 베여있는 듯하다. 새벽 이슬처럼 맑고 옅으나, 벨벳의 커튼처럼 부드럽게 직조된 이 안개는 고요하고 장엄한 침묵처럼 온 포도밭을 휘감아 돌며 네비올로 포도의 생육에 깊은 위로와도 같은 안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수백년 역사의 와이너리들이 줄지어 늘어선 마을 한 가운데에는 시음과 판매를 전문적으로 하는 작은 식당겸 와인샵이 있다. 그곳의 프란체스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주변 밭들의 대부분은 과거 사르데냐 왕실이나 피에몬테 귀족들의 것이었다고 한다. 통일의 주역이었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국왕이 애지중지한 와이너리도 있고, 언덕 너머에는 그의 애첩이 소유했던 포도원이 아직도 성업 중인데 얄궃게도 지금의 오너는 전설적인 파르티자노 유격대장의 아들이다. 바롤로는 이것저것 제법 마셔봤다고 했더니 그녀가 물어본다. “혹시 당신의 고향도요?”


‘당신의 고향(Paesi Tuoi)’은 이름난 바롤로 와인이면서 사실은 파베세 소설의 제목이다. 언제나처럼 고향 땅의 시골 마을이 소재였는데, 야트막한 언덕과 포도밭, 어린 시절의 친구들. 그리고 지나가 버린 여름방학처럼 지금은 아스라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유년 시절의 추억 같은 것들이 거칠고 무기력한 현실의 실존적 비극들과 뒤섞여 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소설이자 대표작인 <달과 불>도 그렇다. 자신의 고향 산토 스테파노 벨보(Santo Stefano Belbo)와 카넬리(Canelli) 그리고 가미넬라 언덕과 살토 계곡 등이 배경인데, 어린 시절 작가의 실제 친구였던 누토도 등장하고 있으니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소설은 한 남자의 귀향으로 시작된다. 20여 년 전 고향 땅을 등지고 미국으로 떠났던 남자는 제법 큰 돈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향수병을 이기지 못해 다시 고향 땅 산토 스테파노 벨보로 돌아온다. 그의 유년시절은 아름답기는 커녕 비참했다. 어린 시절 행려환자로 병원에 있다가 서푼짜리 보조금이라도 아쉬운 의붓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랑게의 언덕에서 살게 된 소년이었다. 그 작은 초가마을마저 가난으로 스러지자, 소년은 모라(La Morra)의 농장에 날품팔이 하인으로 팔려나간다. 사생아였던 소년의 별명은 ‘뱀장어’(안귈라 Anguilla)였으며, 농장주의 딸 이레네와 실비아의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을 연모했으나 그에게는 넘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성공을 쫓아 제노바에서 대서양을 건넜던 그는 ‘어느 누구의 고향도 없는’ 사막 같은 미국에 환멸을 느끼고는,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었지만 동시에 커다란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했던 고향 땅으로 다시금 되돌아오게 된다.


"포도나무 한 그루, 가축 한 마리도 옛것은 남아 있지 않았고, 들판에는 단지 그루터기, 길게 늘어선 그루터기뿐이었으며, 사람들은 자라고 흘러가고 죽었다. 무너져내린 뿌리들은 벨보 강에 휩쓸려갔다 - 그런데도 주위를 둘러보면 가미넬라의 거대한 구릉들, 멀리 떨어진 살토 언덕들 위의 도로, 마당, 웅덩이, 목소리들, 곡괭이들, 모든 것이 그대로였고 모든 것이 예전의 그 냄새, 그 맛, 그 색깔을 띠고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였다. 영화와 소설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이탈리아의 2차 대전사’는 매우 단순하다. 미군이 남부 시칠리아와 나폴리에 상륙해 독일군을 몰아내고 북진을 거듭한다. 그 와중에 무솔리니는 교수형을 당하고, 이탈리아는 조기 종전을 맞고 비교적 빠르게 전쟁이 끝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비중있게 다뤄지는 법이 없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이탈리아 내전(Italian Civil War)이라는 게 있었다. 이탈리아 저항군인 파르티잔과 나치 독일이 보호하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잔당들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내전은 처절하고 비참했으며 잔혹했다. 1945년 봄까지도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었고, 전후 처리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동족상잔이라는 것을 경험해본 우리지만, 이탈리아의 내전은 ‘마을 단위의 비극’이었다. 옆집의 파올로가 친구 아버지인 마리오 아저씨에게 총을 겨눴고, 검은 셔츠를 입은 무솔리니 부대의 프란체스코가 저항군의 아들 루카를 잡아가 마을 광장에서 그대로 교수형을 시켰던 엄혹한 시간들이었다. 


소설 속의 고향도 같은 운명을 겪는다. 파베세는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묘사는 피한 채 주변인물들의 태도와 침묵, 정황을 통해 랑게 언덕을 엄습한 비극을 독자에게도 추체험케 한다. 비가 오면 어딘가에 묻혀있던 독일군의 시체가  떠오르고, 마을 한복판에서 처형당해 방치되었던 레지스탕스의 처리를 놓고는 주임신부와 마을 청년들이 다툰다. 전쟁의 상흔은 물리적인 것도 아니고, 뚜렷한 분노와 투쟁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각인처럼 새겨진 커다란 생채기여서, 그들은 무관심과 침묵, 정성스레 포장한 무기력으로 그 아픔을 외면하고자 했다. 


주인공은 허무에 빠진다. 그를 ‘뱀장어’라 부르며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부으며 천대하던 인간들은 이미 등이 굽고 눈이 침침해졌거나, 아예 옛 기억을 삭제한 채 텅빈 눈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미움도, 복수도, 우쭐한 마음도 그저 다 허망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를 알아보고 나를 만져야 할 손들이, 얼굴들이, 목소리들이 이제 사라졌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남아있지 않았다. 축제가 끝난 이튿날의 광장, 수확을 끝낸 포도밭처럼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홀로 술집으로 되돌아가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파베세는 이 소설을 마지막으로 남기고는 의문의 자살로 그 짧은 생을 마감했다. 작품의 무대가 되었던 고향 산토 스테파노 벨보는 지금도 인구 4천 남짓의 자그맣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다. 길 언덕 위에는 옛 수도원을 고쳐 지은 고급 호텔이 있고, 거기엔 미슐랭 별 하나를 받아낸 아름다운 파인 다이닝도 있다. 마을의 안쪽에는 파베세의 소설에서 이름을 빌려 딴 조그마한 민박들 몇 개가 줄지어 늘어서 정겨운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한다. 



털털거리는 자동차를 작은 오스테리아 앞에 간신히 달래 세우고 파스타 한 접시를 시켰다. 주인이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내오며 목을 축이기를 권한다. 옆 마을 카넬리에서 만들어진 포도주다. 소설에서는 주인공과 누토가 여름 축제를 즐기러 한참을 걸어가는 곳이다. 옅은 호박색을 띤 포도주 한잔 너머로 무심한 가미넬라 언덕이 비쳐 보였다. 나의 유년시절도 한참이나 지나갔고, 그 시절의 여름방학은 밀린 숙제와 복숭아, 잘 익은 청포도와 곤충채집 혹은 물놀이의 기억 정도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주인공은 이제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한 여인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주인집 새 엄마의 막내딸 산티나였다. 배다른 언니들은 병들어 죽거나, 남자들과의 추문에 휘말려 비루한 인생으로 막을 내렸지만, 금발의 산티나는 다르리라는 생각이었다. 주인공이 제노바를 거쳐 미국으로 떠나던 그 시점에도 산티나는 소녀다운 청초함을 잃지 않았던 아이였다. 그러나 누토는 계속해서 확답을 피한다. 


"놈들이 그녀를 죽인거야?"
"집에 가자." 누토는 말했다. "기분전환을 좀 하고 싶었는데, 너하고도 그럴 수가 없네."



소설의 마지막에서야 주인공은 쓰디쓴 진실과 마주한다. 그토록 찾아해맸던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옛 기억, 열망했던 그 소녀의 최후, 사념화된 노스탤지어의 마지막 결말을 기어이 확인하고 만 것이다. 이탈리아 내전의 와중에 파시스트와 레지스탕스군을 오갔던 산티나는 결국 스파이로 몰려 저항군의 손으로 들판에서 처형당한다. 어디 매장당한 사체의 일부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누토는 그마저도 고개를 젓는다. 


"산티나 같은 여자는 땅속에 묻어둘 수 없었어. 바라카가 처리했지. 포도밭에서 가지들을 많이 모아 오게 해서 충분할만큼 덮었어. 그런 다음, 거기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지. 정오에는 완전히 재가 되고 말았지. 작년까지도, 들에 불을 놨던 자리처럼 거기에 불탄 자국이 남아 있었어."


고향은 사라졌고, 아스라한 추억조차 이제는 산산이 흩어졌다. 유년시절 풍년을 기원하며 들판 위에 지폈던 ‘화톳불’(falo)은 이제 세상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파괴의 신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새로운 재생의 단초가 될지, 아니면 영원한 허무의 증거로 남을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식사를 마치고는 마을을 따라 펼쳐진 몬페라토 계곡의 깊은 줄기를 따라 포도밭 위로 계속 걸어 올라갔다. 바람은 시원하고, 잘 익은 포도들이 지천으로 널부러진 느슨한 구릉들은 이곳 사람들의 푸근한 태도만큼이나 가슴 찡한 느낌을 주었다. 문득, 소설 속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곧 벨보 강의 포플러나무들 사이에서, 또 언덕 위의 평원에서 이른 시간부터 엽총 소리가 울리고 치리노가 이랑 사이로 달아나는 산토끼를 보았다고 이야기하는 계절이 왔다. 포도를 수확하고, 잎사귀를 따주고, 포도를 압착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제는 덥지도 춥지도 않고, 또렷한 구름 몇 점이 하늘 위에 떠다니고, 사람들이 폴렌타와 산토끼 고기를 먹으면서 버섯을 따러 다니는 계절이 되었다. 한 해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였다(Sono i giorni piu belli dell'an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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