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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렇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일만 시간의 법칙.

by 아키세라믹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행복합니다 혹은 행복이 별것인가요 즐거운 마음으로 살면 행복한 거 아닌가요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즐거운 마음을 품을 수 있나요? 즐거움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건가요? 되물어 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행복의 근원에 접근하려고 묻고 대답하지만 행복은 주관적인 질문이라는 결론에 닿게 됩니다. 행복이라는 명사가 형용사와 부사를 덧이어 주지 않으면 결코 명료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는 경험상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고, 그래서 행복하지만, 그럴수록 행복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지는 것을 보면 행복에는 다양한 이유와 원인이 있어야 하는가 봅니다.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하는 질문에는 회사원입니다 공무원입니다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처럼 행복과는 거리가 있는 대답을 처음에 놓습니다. 회사원과 공무원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로 인해 행복하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싶습니다. 직업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할 뿐입니다.

무엇 때문에 행복한가요라고 처음부터 물어보면 답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아닌가요?


저도 그렇습니다.

행복은 가슴 벅찬 즐거움이고, 말할 수 없는 인내를 키워야 하며, 고통을 이겨내려는 슬기로운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 같습니다.

행복에 고통이라니요? 행복하고 싶은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이 참된 행복일까요?

불편함을 이겨내는 것은 행복에 가까운 마음이 불편함 보다 더 많이 담겨 있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어휘가 앞설 때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더할 수 없는 행복은 닮은 꼴 같습니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려면 고통마저도 행복과 같은 초록은 동색일 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신 적이 있나요? 순간의 고통이 통증으로 느껴지기까지 짧지만 순간의 찰나가 있습니다. 시각적인 인식이 앞서고 극심한 통증은 그다음에 따라옵니다.

더할 수 없는 즐거움과 행복도 극심한 고통의 순간처럼 시각적인 인식이 앞서고 극심한 통증처럼 찾아옵니다.


도예를 배움으로 선택했던 십 년 동안 마음 가득한 즐거움과 행복을 차라리 극심한 통증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더할 수 없는 행복은 극심한 통증처럼 아렸습니다.

십 년의 세월은 일만 시간의 법칙을 적용할 수 있는 노력의 시간입니다. 무엇에 가 닿을 수 있는 시간이 일만 시간입니다. 소위 한 가지 일에 전문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품이 묻어나는 시간이지요.


물레작업은 소중한 것을 힘주어 껴앉는 것처럼 힘을 주어야 하고, 몸의 모든 뼈마디를 완충판 없이 하나로 이어 붙여 놓을 때 가능한 작업입니다. 손목의 뼈마디는 기형처럼 변하고 손가락 마디는 결혼반지를 끼울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어 갔습니다. 미련한 곰탱이는 저를 두고 하는 말 같았습니다.


그래도 아렸던 통증처럼 미련한 곰탱이짓은 결코 흠이 되거나 고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행복했으니까요.

백자토는 흙색으로 검은색을 띱니다. 청자토는 붉은색을 하고 있습니다. 머리부터 온몸에 흙물투성이로 길을 걸어도, 그 모습으로 음식을 먹어도 행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내가 행복해라 행복해라 주문하고 선택한 행복이니까요.

내가 선택한 행복을 들어 보셨던가요?


내가 주문한 행복해라 행복해라 는 지금도 나를 행복하게 하고 있을까요?

브런치에서 나의 행복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사실 고통 없이 행복하고 싶습니다. 많이 힘들었거든요.

고통을 이겨내며 행복한 것은 의미 없는 고백 같아서 싫습니다. 출간하고 싶은 대단한 욕심도 없습니다.

다만 노력해서 오늘도 내일도 나의 씀이 나의 행복에 더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나가는 작은 의미를 붙잡아 세우고 싶을 뿐입니다. 기쁨 없이 가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입니다.

채근 없이 걸어가고 싶습니다. 고통은 피해 가고 싶고요.

브런치 스토리에서 이루고 싶은 작가의 꿈이 있는지 물어보셨던가요?

제게 마음을 나누어 주신 이백분의 구독자 분들의 사랑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시선을 조건 없이 허락하신 삼백분의 작가님은 충분한 꿈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저는 쓰는 것이 다만 행복할 뿐입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저만의 꿈을 간직하고 있나요?

씀으로 충분히 행복하다면 거기에 제 꿈도 함께 있겠지요.

고 최명희 작가님은 쓰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셨지만 그분의 꿈은 아름다운 어휘에 있습니다.

꿈은 이렇게 저마다 모습이 다르지만 같은 색이지 말입니다.


오늘도 저의 꿈이 이곳에서 새물내를 가득 풍기며 춤을 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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