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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혜인 Sep 10. 2020

세상을 감각하기

타인에게 공감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꿈을 내려놓은 뒤에도 계속 글을 쓰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나만의 색깔을 찾아 나가는 중이다. 픽션이라는 가면은 참 매력적이다. 내가 마음껏 진실을 드러내도 픽션이라는 가면 아래 내가 숨기고 싶었던 진실을 숨길 수 있다. 그래도 그 이야기는 진실이기에 그 어떤 것보다도 힘이 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것에 관해 의문을 품어왔었다. 과연 그것이 뭘까. 언론고시를 준비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주변에서 이미 그 업계에 몸담은 사람들에게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아니야,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분명히 있는데 그걸 아직 네가 아직 못 알아챈 것뿐이야.”


라는 말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건 지금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에서 나온다. 사실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걸 잊어버리려고 하는 게 일반적인 행동이지만, 작가라면 그 순간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 순간을 가만히 잘 들여다보고, 왜 그런 불편함을 느끼는 건지 내 안의 나와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과정에서 조금씩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는 것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 좋은 경험이 아닌 나쁜 경험. 힘든 경험. 아픈 경험.


 같은 아픔도, 슬픔도, 괴로움도 사람마다 다르게 느낀다. 같은 아픔이라도 A가 느끼는 아픔과 B가 느끼는 아픔은 그 크기가 다를 것이다. 좋은 건 암만 비교해도 그저 좋은 것이기에, 깊이가 없다. 진짜 깊이는 슬픔에서 오는 것이고 내가 가진 슬픔을 가장 똑바로 직시한 경험이 있을 때, 깊이를 담은 이야기를 쓸 수가 있다.    


 그래서일까. 작가 중에서는 제정신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나는 왜 그런 이야기가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다. 그 이야기는 항상 내가 하는 이야기 중 하나니까.




 의도치 않은 슬픔이 내게 찾아왔을 때 나는 그 슬픔에 고맙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슬픔을 감각하는 정도가 더욱 정교해질 것이기에. 그래서 나는 크고 작은 슬픔을 맞닥뜨릴 때마다 때론 그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라서 ‘작가’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그 슬픔을 마주하였다. 그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그리고 여전히 감당되지 않는 슬픔을 내 안에 품게 되었고 그 슬픔을 바탕으로 글을 썼을 때 사람들에게서 더욱더 깊은 공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때 “공감과 감동은 기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서 온다.”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로 살겠다는 다짐은, 앞으로도 수없이 크고 작은 슬픔을 맞닥뜨리며 그 슬픔을 쉽게 외면하지 않고 정교하게 다듬어 나가겠다는 다짐과 같다.


 슬픔을 진정으로 이해한 자만이 행복을 가장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다. 악인을 가장 잘 이해한 자만이 가장 악독한 악인과 누구보다 선한 선인을 그려낼 수 있다. 내가 언론고시를 공부하면서 하고 싶은 말이 없었던 이유는 세상의 슬픔을 덜 감각했기 때문이었을 테다.


 하고 싶은 말은 불편한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내게 지나치게 불편한 일이 그때까지 없었다는 방증일 테니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세상을 감각하려 애쓰면서 나는 나의 슬픔을 감각하는 법을 배웠고, 나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슬픔을 알아보는 눈을 갖게 되었고, 이후에는 그것을 쉼 없이 직면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 순간이 잦을수록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는 것을 느낀다.


 세상을 감각하고, 그것으로 타인과 접점을 이루는 것이 가능한 순간은 나와 가장 가까이 맞닿은 세상의 슬픔을 감각할 수 있을 때다. 때로는 상처를 승화한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운 삶은 승화된 추악한 상처를 딛고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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