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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혜인 May 03. 2018

잘난 부모의 자식으로 산다는 것은

그 아빠와 그 딸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아빠가 주무시니 집에 들어와도 된다고 했다. 전화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PC방 안에 담배 연기가 너무 심해서 머리가 아팠다. 너무 피곤했다. 수능까지 100일도 안 남았는데, 아빠의 횡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엄마 얼굴이 쏙 나왔다. 검지를 입술 위에 대고 나를 내 방으로 밀어 넣었다.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오자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미적분 공식을 한 번 더 보려 했는데 그 생각은 졸음 앞에서 처참히 무너졌다.



 

계속 뒤척였다. 매일 꿈에는 숫자들이 튀어나왔다. “9월 모의고사에서 60점을 받았으니 벌을 주겠다”라고 말하면서. 그러다 보면 아침이 되었고 엄마가 나를 깨우고 있었다. 새벽 7시였다. 아빠가 일어나기 전에 집에서 나가야 한단다. 왜 아빠의 눈치를 보느라 집에 제시간에 들어오지 못하고 잠도 못 자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 고3이야! 차라리 집 나가 방 구해서 살래.” 괜히 엄마에게 화를 냈다.


“그래, 힘들지.” 엄마는 그저 수동적으로 대답했다. 아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팽팽하게 날이 선 아빠와 나 사이에서,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최대한 비위를 맞춰주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를 타고 와서인지 학교까지는 금세 도착했다. 아빠에 대한 불만은 한참 마음에 쌓여 있었지만, 시간은 더 말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차 안에서 불만을 터뜨렸던 시간은 고작 10분이었다.




부모님 직업이 의사라는 소문은 친구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졌다. 언제나 그랬다. 친구들은 다른 아이 부모님 직업은 금방 잊어버리면서 우리 부모님 직업은 한 번만 들어도 기억했다. 그리고 내가 돈 많은 집 자식이라며 부러워했다. 아빠 때문에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매일 집 앞 PC방에서 아빠가 잠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면 친구들은, “매일 PC방 갈 돈도 있고, 부럽다”라고 말했다. 아빠의 기대치는 너무 높았다. 자식 등수가 낮은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부엌에서 엄마와 맛난 것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가도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 나는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빠의 존재로 집안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도대체 점마는 고등학교 가서 왜 성적이 이것밖에 안 나오는데?” 아빠는 엄마에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듣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빠는 방문을 세차게 열고 때릴 듯한 기세로


“그딴 성적으로는 니 대학도 못 간다”라며 내게 삿대질을 했다. "아빠가 학원 안 보내주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공부 다 하게 해주는데 도대체 왜 성적이 그따구야." 엄마가 달려와 아빠를 데리고 나갔다. 아빠는 못 이기는 척 끌려 나갔다. 다시 방문이 닫히고 고요한 순간이 찾아오면, 먹먹한 무언가가 목구멍에 걸려 한동안 내려가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어 주었더라면. 아무 말 없이.


결국, 수능을 잘 보지 못했다. 한번 깨진 공부 리듬은 돌이키려 해도 절대로 돌이켜지지 않았다. 중학교 때 나와 성적이 비슷했던 친구들은 서울의 주요 대학교에 합격했다. 나는 아니었다. 모든 것은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가 갑작스럽게 방문을 열고 삿대질만 하지 않았으면, 아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면, 나를 좀 편하게 해 줬더라면, 이것보단 성적을 잘 받았을 텐데. 대학교에 다니는 내내 줄곧 아빠 탓을 했다. 아빠만 없었으면, 나는 지금보다 잘 되었을 거라고. 아빠가 조금만 덜 잘났으면, 내게 큰 기대가 없었을 거라고. 그럼 지금보다 덜 불행했을 거라고.




내가 불안했던 건 서울의 주요 대학교를 가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던 듯하다. 대입에 실패하며 엄마는 틈만 나면 의학전문대학원 이야기를 했다. 의대를 가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말도 했다. “적어도 네가 준비하는 방송국 PD보다는 되기 쉬울 거다”라고 말하면서. 마음 한편에 ‘의과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조금씩 커졌다.


마침 의학전문대학원 제도가 대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의대 진학을 돌아보았다. 의사 부모 밑에서 자랐으니, 제대로 공부하면 의학전문대학원에 합격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도 있었다. 그런데 과학 공부는 정말 재미가 없었다. 게다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 하면서 아빠를 끊임없이 탓했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아빠를. 잘난 아빠의 존재를. 그렇게 한다고 불안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잘난 부모의 자식으로 사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엔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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