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밤새 잠을 못 자서인지 평소보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날이었다. K 방송국 드라마 PD직 2차 필기시험 결과 발표일. 합격할 자신 있었다. 이번만큼은.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담담한 척하며 애써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눌렀다. 합격할 거라고, 몇 차례 확신을 거듭한 일이었다. 발표날, 단단하던 확신은 어디로 가고 의심이 툭 튀어나왔다. 떨어질 것 같다. 방송 PD를 준비한 지 어언 3년째. 한 번도 필기시험을 통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글을 제출하며 잘 썼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계속 K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렸다. 또 통과하지 못한다면, 어느 때보다 가장 아플 것 같았다. 회사에 화려하게 이별을 고하며 방송국으로 이직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발표일은 설 전날이었다. 부서 사람들은 신년 들어 처음 맞는 긴 연휴라며, 일찍 퇴근하자고 했다. 좋은 일이었다. 안 그래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는데, 상사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역 앞의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북적거리는 지하철 안이 아닌, 조용한 곳에서 결과를 확인하고 싶었다. 공원 안을 천천히 걸었다.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야 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게 그래도 시간을 빨리 가게 할 방법이었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 결과 나왔니?” 아니, 아직.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엄마가 잠깐 할 일이 있다며 잠시 후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었다. 홈페이지에 다시 접속했다. 못 보던 창이 하나 생겼다. 결과가 드디어 나왔다.
눈을 의심했다. 거짓말이다. 불합격. 또렷이 적힌 세 글자는 몇 번을 다시 들어가서 확인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토해내던 눈물을 잠시 멈춘 하늘은 하얬다. 파란 하늘이면 좋았을 텐데. 불합격했으니 매우 슬퍼야 했다. 아파야 했다. 며칠간 밤잠을 설치게 할 만큼 긴장했던 마음은, 불합격하면 아플 것이라고 경고하던 마음은 이 ‘불합격’ 세 글자 앞에서 진실을 토해냈다. 차분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기분이, 무척 괜찮았다.
"괜찮아. 봄이 오면 너도 꽃을 피울 테니까."
곧, 누가 합격하고 누가 불합격했는지 묻는 카톡이 왔다. 여섯 명이 들어 있는 면접 준비 모임 카톡 창에 저마다 통보받은 단어가 쏟아졌다. 불합격, 불합격, 불합격.... 여섯 명 중에 두 명만 합격했다. 합격한 자들은 합격했다는 사실을 말하기를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불합격한 자들은 괜찮다고 말하며 합격한 자들을 축하했다. 그러면서괜찮다는 말로 서로를 위로했다.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다시 전화를 건 엄마는 결과를 묻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계속 제자리를 맴돌았다. 사실, 엄마는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불합격했다는 말을 전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괜찮다”는 말이 돌아왔다. 우리는 괜히 딴 이야기를 했다. 오늘 점심 메뉴가 어땠다는 둥, 일찍 퇴근해서 오랜만에 외식할 거라는 둥. 나는 이틀 전에 만났던 K사에 다니는 선배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합격할 자신이 있으니 여기까지 찾아왔겠지." 결과를 알기도 전에 면접에 가면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한 선배가 결과가 나오면 합불 여부에 상관없이 알려달라고 했었다.다른 선배가 받아쳤다. "아냐, 합격할거야. 3년 정도 됐으면 이제 합격할 때도 됐어."
"괜찮아?"
엄마의 말에 선배들 생각이 잠시 끊어졌다. 엄마의 괜찮냐는 물음에 나는용수철에 튕겨나가듯이 말했다. "응 괜찮아. 곧 M사 공채도 있어. 거기서 합격하면 되지 뭐." 사실 마음은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끝내 실패한 건지도 모른다. 불합격한 사실은 혼자 알고 있을 때가 괜찮았다. 패배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때보다 누군가에게 말할 때가 더 아팠다. 내 실패를 들은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할지 예측하는 시간이 아팠다. 그 모든 순간에게 그저,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