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라 구름 기린 Nov 10. 2022

해춘하다

2. 지난 10년 간 당시의 모습을 하나의 동사나 형용사로 표현한다면?


2. 지난 10년 간 당시의 모습을 하나의 동사나 형용사로 표현한다면, 어떤 사람이었는가?


- 나와 당신의 서른 즈음에 28p / 서른 즈음에 프로젝트 , 부암 게스트하우스 출판사



해춘 하다(= 때가 되면)



일요일 심야시간에 박은석, 임진모 같은 평론가들이 나와서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 라이브 클립 놓고

유창하게 소개하는 것들을 보면, 저 사람들의 딥한 시각과 성찰은 타고나는가,

나는 언제나 저렇게 되나 싶었던 때가 있었다.


위키가 없던 그 시절에 파편화된 정보들을 엮어서 5분 10분 긴 호흡으로 얘기할 수 있는 그들의 취향이

매우 멋있어 보였고 상대적으로 가요에 집중된 내가 가진 취향들은 얕고 큰 줄기 없이 보여

남에게 내세우기 부끄러운 개인의 취향들로 생각되곤 했다.


나, 내 취향은 언제 무게를 가지게 될까.


막연히 가지던 궁금증에 답은, 그냥 그건 시간이 지나면 되는 거였다.


음악 취향에 국한하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난 취향에 대해 큰 힘을 쏟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시간이 이동 중이거나 카페에서 멍을 때리며, 시간 날 때 잠자기 전 생각날 때 조금씩

시간을 들여 궁금한 것을 찾거나 업데이트를 해가 그 취향에 정보와 성찰이 아닌 개인적인 시간을 쌓아갈 뿐.


그때도 중학생이 듣기 올드한 스쳐 지나간 김장훈이, 이승환이 시간이 충분히 쌓인 지금은 무게를 가진 취향이 되고 5분이고 30분이고 긴 호흡의 얘기를 쏟아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건 그냥 때가 되어 거기에 내 이야기가 쌓이면 되는 거였다.

딥한 분석력과 통찰로 노래의 의미를 파내는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많은 결핍은 시간이 되면 채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10년 전의 회사 신입이었던 나는 담당 사장이 모가지 날리려고 고민하던 파리 목숨이었다.

6개월 시용기간에 일이 느리다고, 맘에 들지 않는다고 모가지를 바이든 하려던 걸 우리 전무와 부장이 뜯어말려

시용을 넘기고, 주어지는 거지 같은 잡일들을 쳐내었으며, 그 사이 회사 이사를 2번을 치워 2~3년 새 3번째 회사 이전을 앞둔 10년에 이르렀다.


구멍 난 사소한 디테일에 모멸 수준의 갈굼과 자질 평가를 받을 때

무던히도 나는 나를 공격하며 내가 나를 씹어 헐게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자조적으로 나의 부족함을 쓴 소주잔에 얹어 삼키는 날이 많았다.


매 3년이 아닌, 매 3개월마다 내 삶의 방향과 나의 인정 욕구를 두고 사표와 이직을 고민했던 나는

어느덧 세월이 흘러 대격변의 줄퇴사 시즌에도 조용히 남아, 애들 갈려나가는 파트에 땜빵으로 앉아 어떻게든 굴려서 막아 낸, 달갑지 않았고 본심에 추호도 없는 조직에 로열티로 인정을 받고 있는 구성원이 되었다.

그렇게 올해 만 10년에 이르렀다.

(물론 우리 매형은 나의 연봉 테이블을 보면 이직하라고 매번 얘기를 한다만. 나의 작고 프띠 한 연봉 테이블.)


눈 뜨면 불안했던 그 시간들,모두에게 답이 되진 않겠으나,

내게는 시간이 답이었고 취향의 무게와 결핍은


때가 되면 해결되는 일들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바닷물 마시는 나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