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해파랑길은 영덕 블루로드를 2박 3일에 걸쳐 걷는 일정이다. 영덕 블루로드 길은 해파랑길 19코스에서 22코스까지 이어지는 66.5km에 달하는 길로 화진해변에서 시작된다. 포항역에 내려 버스로 송라해변까지 이동한 후 거기서부터 화진해변까지 걷는다. 비도 반갑고 바다도 반갑다. 중간에 들린 중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 꽤나 유명한 맛집인 듯 손님들이 줄 서서 기다린다. 여종업원의 서비스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음식 맛은 좋았다. 허긴 열심히 걷고 먹는 식사가 맛없을 리는 없을 것이다. 모두 커피를 그리워한다. 해안가에는 펜션이나 숙소는 많은데 생각보다 카페는 없다. 해안가를 내려다보는 전망 최고의 위치에 편의점이 있다. 벤치 하나를 억지로 힘으로 옮겨서 두 개의 벤치를 이어서 함께 앉아 바다를 감상하며 커피를 마신다. 최고의 오픈 카페!! 더 이상 좋은 분위기는 있을 수 없다.
숙소에 오후 5시경 도착한 후 간단하게 씻은 후 ‘태능갈비’라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고기와 함께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걸었던 즐거움을 나누며 웃음과 대화는 잠시도 끊이지 않는다. 누가 어떤 말을 해도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서로를 격려하고 아끼는 마음도 보기 좋다. 먹고 마시는 고기와 술이 늘어나는 만큼 웃음과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대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이어진다. 누군가가 마이크 세팅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어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좀 전까지 음식을 서빙하는 안주인께서 직접 생음악을 선물해 주신 것이다. 흥은 이미 오를 대로 올랐고, 신청곡도 이어진다. 노래를 따라 부르다 흥에 못 이겨 드디어 몸짓까지 난무한다. 친구, 노래, 술, 음식, 대화, 그리고 하루를 함께 걸었던 추억과 길벗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하나가 된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길,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건강, 시간적 여유, 금전적 여유, 멋진 길벗, 음악, 술과 음식, 그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할까?
이튿날 아침 6시에 어둠을 뚫고 걷기 시작한다. 바람도 드세고 날씨도 춥다. 렌턴에 의지해서 산길을 오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침묵을 유지하며 일렬종대로 걷는다. 오른편에는 바다가 검게 보이고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마치 바다에 떠있는 산처럼 보인다. 이른 아침 산길을 고귀한 침묵을 유지하며 걷는 모습은 수행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불교에는 안행(雁行)이라는 말이 있다. 새벽 예불 마치고 스님들이 줄을 서서 걸어 나오시는 모습이 마치 기러기가 줄을 맞춰 날아다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안행이라고 한다. 우리의 걷는 모습도 안행이다. 산속을 걸으며 틱낫한 스님의 프럼 빌리지 (Plum Village)가 떠오른다. 프랑스의 이 마을에서 틱낫한 스님은 명상을 지도하셨는데, 특히 걷기 명상을 중시하셨다. 대중과 함께 걷기 명상을 하시며 일상 속 명상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신 분이다. 우리가 올라가는 고불봉은 이날은 프럼 빌리지가 되고, 올라가는 모습은 안행이 된다.
고불봉에서 내려오며 풍력발전 시설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만들어낸다. 이 길은 산과 바다를 양쪽에서 바라보며 걷는 멋진 명품길이다. 푸른 하늘에서 풍력 발전기 날개가 돌아가며 만들어 낸 그림자는 나무와 땅을 음지에서 양지로 또 양지에서 음지로 변화시킨다. 평생 양지도 없고, 평생 음지도 없다. 그러니 양지라고 뽐 낼 필요도 없고, 음지라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 돌아가는 날개가 전기를 만들어내듯, 음지와 양지가 우리네 삶을 만들어낸다. 한 그루 나무의 단풍잎도 햇빛이 비추는 양에 따라 색깔이 다르다. 그리고 단풍잎은 아직 채 물들지 않은 나뭇잎을 보며 자신을 뽐내지 않고, 물들지 않은 나뭇잎은 빨간 단풍잎을 시샘하지 않는다. 서로 색이 다른 나뭇잎이 어우러져 더 멋진 단풍나무를 만든다.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이 아름답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장애인과 비장애인,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피부색이 다른 인종, 어른과 어린이, 여자와 남자, 상사와 부하 등, 모든 사람이 어울려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이것이 세상이고, 이런 세상은 아름답다.
영덕 해맞이 공원에서 축산항까지 이어지는 길인 해파랑길 21코스는 해안길로 과연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최고의 코스로 선정한 이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품길이다. 길에 ‘명품’이라는 사치스럽고 세속적인 단어를 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명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길이다. 바위 구간에 조성된 데크길까지 다가오는 파도의 하얀 포말은 저절로 환호성을 부르게 만든다. 바닷바람을 가슴에 담고, 파도의 하얀 포말을 눈에 담는다. 그럼에도 모두 담을 수가 없다. 담아도 담아도 모두 담을 수가 없다. 모두 담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욕심이다. 그냥 그 순간 거기서 만난 바다와 바람을 보고 느낀 것 자체로 만족해야만 한다. 너무 오랫동안 쭉 이어지는 이 명품길도 한 가지 단점이 있다. 걷는 내내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바닷바람을 들으니 약간 지겹다는 느낌이 든다. 모두 담고 싶다는 마음은 금세 변해 지겨움으로 변한다. 명품도 그렇지 않을까? 따라서 자연에게 명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큰 결례다. 그냥 멋진 길,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모든 길은 멋지다. 이날 우리는 20. 21 코스를 하루에 걸었다. 트랭글의 기록에 의하면 총거리가 35.6km에 달한다. 아침 6시에 걷기 시작해서 저녁 5시 넘어 끝났으니 11시간 정도 걸은 것이다. 길이 우리를 미치게 했는지 아니면 우리가 미쳐서 이 길을 걸었는지 잘 모르겠다.
드디어 이번 여정의 마지막 날에 영덕 블루로드의 마지막 구간인 해파랑길 22코스를 걷는다. 축산항에서 시작해서 고래불해변까지 걷는 코스다. 아침 이른 시간에 대소산 봉수대까지 오르는 길에 자연스럽게 침묵을 유지하며 걷는다. 이런 침묵 걷기 시간은 참 소중하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자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자연의 바람이 주는 촉감도 느낄 수 있고, 바다의 일출이 보내오는 사랑의 강렬함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홀로 조용히 걷는 것도 좋다. 함께 걸어도 서로의 침묵을 존중해 주며 홀로 조용히 걷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대소산 봉수대를 지난 후 작은 두 개의 산을 능선을 타고 걷는다. 그리고 고려 후기 문신으로 이름 높았던 목은 이색 선생님께서 걸었다는 숲길 산책로를 만난다. 길이 참 차분하고 평화롭다. 이 구간이 끝나는 지점인 고래불 해변은 이색 선생님께서 고래가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명명했다고 한다. 목은 기념관 주변에 조성된 괴시리 전통마을에서 고래불해변까지 이어지는 8km 구간은 평지로 끝없이 이어진다. 2박 3일 내내 걷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걸어도 걸어도 길이 줄지 않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길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비록 그 끝이 다른 길의 시작이 될지라도. 늘 행복은 고통 끝에 찾아온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간 고래불 해변의 식당인 ‘정직한 바다 횟집’(054-733-2037)은 5대째 장사를 이어오신 70대 초반의 안주인의 운영하시는데 그 따뜻하고 풍요로운 마음씀씀이가 우리의 피로를 쉽게 씻어준다.
드디어 2박 3일의 여정이 끝났다. 이 길에서 만난 길벗과 길, 그리고 사람들 덕분에 행복했다. 특히 총무와 식당 검색, 재빠른 행동으로 모든 참가자의 불편함을 미리미리 챙겨서 도움 주셨던 에단호크 님께 큰 감사를 전한다. 마치 길벗의 편안함은 자신의 몫이라는 사명감이라도 가진 듯 몸을 사리지 않고 애써주신 에단호크님꼐 마음의 큰 빚을 졌다. 2박 3일 내내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못하고 우리의 걷는 모습을 사진과 영상에 담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애써주신 범일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특히 범일님은 분위기 해피 바이러스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상황에 맞춰 적절할 때 말과 몸짓으로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셨던 범일님께도 큰 빚을 졌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또 매우 지친 상황에서도 힘든 내색조차 하지 않고 또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었던 모든 길벗에게도 큰 빚을 졌다. 다음 길로 빚을 갚아 나갈 생각이다. 함께 걸었던 모든 길벗님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