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걷고 Apr 11. 2024

죽음 명상

어제 본 TV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불록’에 장례 명장인 유재철 씨가 나와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쓴 책 ‘대통령의 염장이’를 읽었고, 그의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한 영화 ‘숨’도 보았다. 아마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고 있기에 이런 책, 영화, 인터뷰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거 같다. 어제 그가 한 말 중 기억에 남는 말이 두 가지 있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는 매일 거울을 보며 오늘 죽는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일을 할까?” 이런 말을 하면서 죽음을 수용하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과의 모습이 다르다고 했다. 죽음의 수용, 말은 쉽지만 결코 쉽지 않다. 모든 존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우리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존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모든 존재는 반드시 죽게 되어있다. 태어나서 머물다 변해서 사라진다(죽는다). 무상이다. 무상을 인정하지 못하고 불로초를 구하려는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마치 천년만년 살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며 현실에 집착하고,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기도 한다. 나무도 잎이 무성하다 모든 나뭇잎이 떨어지며 나목으로 살아가다 봄을 맞이하여 활기를 되찾는다. 그리고 다시 나목으로 변한다. 끊임없는 윤회다. 자연은 이런 자연의 이치를 어떤 판단과 해석, 결정을 내리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인다. ‘수용하다’, ‘받아들인다’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정작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욕심 때문이다. 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이 역시 제대로 비웠다기보다는 비웠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 비운 사람은 비웠다는 얘기를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자신도 알고, 주변 사람이 스스로 알고 인정한다. 무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삶의 어떤 고통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이 말을 바꾸면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삶은 평온할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말을 들으며 법정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스님께서는 물건을 구입하거나 행동하실 때 기준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 물건이 또는 이 언행이 나를 단순하게 만들어 줄 것인가 아닌가라는 기준이다. 필요해서 산 물건이 짐이 되는 경우도 많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화살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물건을 줄이고 말을 줄이면 삶은 저절로 단순해진다. 단순한 삶은 계율만 잘 지켜도 유지할 수 있다. 게다가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오늘 죽는다는 전제하에 오늘 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한다면 삶은 매우 단순하고 충만할 것이다. 이는 매우 훌륭한 죽음 명상이 된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누군가에 대한 원망을 하거나, 돈을 더 벌려고 기를 쓰거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 명상이란 죽음을 염두에 두고 매 순간 자신이 하고 싶은 또는 하고 있는 행동, 말, 생각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보면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 삼업을 짓지 않게 됨으로써 업장이 더 쌓이지 않게 된다.      


요 며칠간 딸네 머물며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누가 나를 괴롭힌 것도 아니고, 상황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내면의 불편함 때문이다. 무엇이 불편한지 가만히 살펴보니 딸네 머물며 나의 일상, 즉 루틴을 지키지 못한다는 불편함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루틴이 무엇이고 또 왜 그렇게 중요해서 불만을 만들어냈을까? 특별히 할 일도 없는 사람이다. 매일 출근할 일도 없고, 누군가를 억지로 만날 일도 없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다. 하는 일이라곤 걷고, 글 쓰고, 명상하고, 상담하는 일이 전부다. 걷는 것은 생활화되어 있기에 언제 어디서나 걸을 수 있다. 글은 일주일에 두 세편 정도 늘 쓰고 있다. 명상은 상황에 따라 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상담은 일주일에 한 사례만 하고 있을 뿐이다. 딸네 머물면서도 일상적인 일을 수행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근데 불편하다.      


힘든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루틴을 만들고 지키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할 일이 없는 사람이기에 무언가 할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루틴이고, 그 루틴은 나를 지켜주는 지킴목이 되어왔다. 근데 어느 순간 그 지침목이 사라지거나 해체된 느낌이 들면서 불편함이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 아내와 함께 딸네 가서 도와주는 것이 벌써 2년이 지나가고 있다. 꽤 오랜 기간이고 앞으로도 당분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일주일에 딸네 머무는 요일이 자꾸 바뀌고, 최근에는 나흘 이상 머물고 있다. 내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모두 집에 있는데, 딸네 갈 때마다 짐을 꾸리기도 하고, 때로는 업무 상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에 혼자 돌아올 때도 있다. 두 집 살림을 하며 일상 패턴이 무너진 것이 불편하게 다가왔고,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불편함이 쌓이게 된 것 같다. 딸은 티 내지는 않지만 내 눈치를 보는 것 같고, 아내도 나에게  더 신경 쓰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마음이 더 불편해지고, 미안하기도 하고, 일종의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가족의 구성원으로 또 가장으로 당연히 할 일을 하면서도 불편을 느끼는 나 자신이 싫기도 하다.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 과연 나는 오늘을 어떻게 보내게 될까? 손자들과 즐겁게 놀며 손자들의 웃음소리와 웃는 얼굴을 한껏 마음에 담고 싶다. 딸과 사위에게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사는 거 별 일 아니니 너무 애쓰며 살지 말고 편안하게 살아가라는 말을 하고 싶다. 아내에게는 그간 나와 살아줘서 고맙고 당신은 세상에서 얼굴도 마음도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내일 죽는다면 딸네 머무는 매 순간을 너무 고맙고 귀하게 생각할 것이다. 일분일초가 아까워 조금이라도 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 내일 죽는다면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거나 아니면 전화 통화라도 하면서 그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을 하고 싶다. 이 글을 쓰니 그간 딸네 머물면서 못난 마음을 지닌 자신이 너무 창피하고 한심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글을 쓰며 반성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조금 더 나은 남편으로, 아빠로, 할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 삶의 많은 일은 우선순위가 바뀌게 될 것 같다. 일상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이 매우 사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욕심도 사라질 것이고, 누군가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도 눈 녹듯 녹을 것이고, 대신 그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이 충만할 것이다.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미워하기도 했고 원망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내가 얻은 것은 화병뿐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지만, 결국 얻은 것은 소진뿐이다. 명상을 한다고 하고 있지만, 결정적일 때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명상의 근육이 약해서이다. 불교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정작 힘들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부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안다고 떠들기도 했는데, 돌아온 것은 후회뿐이다.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그래도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매일 새로운 날이고 나는 매일 다시 태어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순한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