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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Apr 15. 2024

우리가 걷는 이유

아침 식사 후 신문을 읽고 나서 늘 습관적으로 하듯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연다. 글감을 갖고 대부분 글을 쓰는데, 오늘은 딱히 떠오르는 글감이 없다. 그래도 그냥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어떤 글이 나올지, 무슨 내용을 쓸지 전혀 예상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냥 그렇게 해 보기로 한다. 이것도 재밌다. 글감이 있을 때에는 이미 그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 구상을 해 놓았기에 생각을 풀어내어 글로 정리하면 된다. 물론 가끔은 애초 구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글이 써지기도 한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고, 글이 나를 이끌어가고 스스로 마무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쓰고 싶은 얘기와 하고 싶은 얘기가 다를 경우에 글은 나의 마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하고 싶은 얘기를 하게끔 나를 이끌어간다. 즉 글이 나를 쓰고 있다. 쓰고 싶은 얘기는 머리가 하는 얘기고, 하고 싶은 얘기는 마음이 하는 얘기다.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글이 나를 이끌어 가니 저절로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      


요즘은 해파랑길에 대한 생각을 주로 하며 지낸다. 처음으로 2박 3일간 길동무들과 함께 진행자로 길을 걷는다. 혼자 걸을 때와 안내자로 함께 걸을 때는 마음가짐 자체도 다르고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 몇 개월 전 혼자 남파랑길을 걸을 때는 기차표와 첫날 숙박 장소만 예약하고 다른 것은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났다. 아무리 준비를 철저하게 해도 현장은 나의 예상과 다를 경우가 많다. 준비를 철저히 하면 그만큼 안심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준비 과정에서 미리 지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알게 된 사실인데 기획하고 준비하는 일을 잘 못하기도 하고, 귀찮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이다. 기획형 인간이 아니고 오히려 현장형 인간이다. 머리보다 몸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회사 업무를 할 때는 제법 기획을 잘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막상 회사를 벗어나니 전혀 아니다. 일단 부딪치고 보자는 무모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용감하거나 두려움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그냥 기획하는 것을 귀찮아한다는 것이 딱 맞는 말이다. 알아보고 확인하고 점검하는 과정이 이제는 너무 귀찮고 불편하고 싫다. 그냥 주어진 대로 현장 상황에 맞춰 지내고 싶다. 그런 면에서 나는 리더형이 아니고 따르는 사람이다. 군말 않고 따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친구들 만나도 식당이나 놀러 가는 것에 대해 어떤 의견도 내지 않고 그냥 따른다. 그리고 아무런 불평불만도 제기하지 않는다. 생각 없이 따르는 것이 편한 사람이다. 생각 없이 살고 싶은 사람인가 보다.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도 그렇게 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구간별로 나누어놓은 지도를 핸드폰에 저장한 것이 길에 대한 모든 정보다. 스크린 숏으로 저장한 사진이다. 책은 딱 한 권만 읽었다. 하지만 그 책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후배가 선물해 준 책인데, 이 책에서 배운 것이라곤 산티아고 길이 있다는 사실 밖에 없다. 그리고 프랑스 왕복 비행기와 첫날 숙소를 배정받을 수 있는 산티아고 생장 사무실 찾아가는 방법, 프랑스 도착 후 숙소 1박 예약과 생장까지 가는 교통편, 산티아고에서 파리로 오는 항공편 예약이 내가 한 일의 전부다. 길에 대한 또 알베르게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 걷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어플을 다운로드하여 알베르게 위치, 식당 위치. 맛있는 음식과 식당 검색, 길 안내 표식, 식재료 주문을 위한 번역 어플, 베드 버그 퇴치용 약물 등 많은 것을 준비해서 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내 핸드폰에 산티아고 어플을 깔아주기도 했다. 내가 걷는 모습이 답답해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숙소가 모두 만실이 되어 한 코스를 더 걸어 40km 이상 걸으며 속으로 욕을 한 적은 있지만, 이런 경우는 두세 번에 불과하다. 완벽한 준비를 하고 떠나나, 그냥 떠나나 길 위에서 마주치는 상황은 큰 차이 없다. 그것보다 완보를 하느냐 못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다짐 한 내용이 떠오른다. 무조건 걷는다. 아프면 무조건 택시 타고 공항으로 가서 귀국한다. 이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주 편안하게 총 920km를 완보했다.      


경기 둘레길을 걷기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1년 3개월에 걸쳐 매주 걸으며 완보했다. 지도를 봐도 길을 잘 못 찾는 길치다. 물론 혼자 간다면 어떻게든 찾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길동무들이 나를 안내하며 함께 걸었다. 내가 길 안내자인데, 그들을 의지하며 걸었다. 접근성이 좋지 않아 미니버스를 한 대 대절해서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다. 길을 놓치면 길동무들이 길을 안내해 주고, 배고프면 식당을 검색해서 찾아준다. 미니버스가 늘 대기하고 있으니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해도 걱정하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물론 참석자들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으로 인해 잠시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완보에 초점을 두고 걸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 혼자 완보했다. 참석자들은 개인적인 상황으로 인해 중도 포기하거나 매주 참석이 어려워 일부 구간을 함께 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별다른 준비 없이 860km에 달하는 거리를 완보했다. 모두 길동무 덕분이다. 운 좋은 사람이다.      


드디어 해파랑길을 4월 말에 시작한다. 한 달에 2박 3일간 약 60km 정도 걸으면 총 거리 750km에 달하는 이 길을 완보하는데 13개월이 걸린다. 폭서기와 혹한기에 쉰다면 1년 반 정도 걸릴 것 같다. 상황에 따라 60km 정도를 걸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 길은 몇 년 전에 포항까지 걸었던 적은 있지만, 그때는 내가 걷는 방식처럼 모든 구간을 걸었던 거 같지 않고 중간에 가끔 점프하며 걸었던 것 같다. 다른 안내자를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걸어서 이 길의 상황을 잘 모르겠다. 남파랑길을 일부 구간 걸었기에 이 길의 난이도 수준을 어느 정도 감 잡을 수는 있지만, 해파랑길의 난이도 수준이 남파랑길과 같은지 다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두세 번 걸으면 길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이후에 걸을 수 있는 거리를 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늘 그렇듯 자세한 준비와 기획을 할 줄도 모르고 귀찮아서 하지도 않고, 그냥 상황에 맞춰 걸을 계획이다. 다만 혼자 걷는 것이 아니기에 숙소 예약이 중요하다. 식사는 걷다가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면 된다. 만일을 위해 참석자 모두에게 한 끼분의 식사나 식사 대용품을 준비하라고 공지를 올렸다. 혹시나 중간에 식당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배고프지만 않으면 걷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의식주(衣食住)가 생활의 기본 요소라면 이미 모두 준비된 것이다. 옷은 알아서 입을 것이고, 식사는 어딘가에 들어가서 먹을 것이고, 숙소는 이미 예약되어 있으니, 걷기만 하면 된다.      


하루 걷는 것, 이틀 걷는 것, 삼 일간 걷는 것 모두 다르다. 걷는 행위는 같지만 계속해서 며칠간 걷는 것은 하루 걷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몸도 피곤해 지고, 마음에 불편함도 생길 것이고, 함께 걷는 사람과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물론 매일 걸으며 느끼는 몰입이라는 멋진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잠자고 먹는 환경도 다르고, 평상시 자신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 나타날 수 있어서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모습에서 탈피할 수 있다. 여행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일상의 편안함을 스스로 포기하고, 자신을 길 위에 던져서 단련시키고, 한계를 경험하고 뛰어넘으며, 야생성을 회복하는 것이 걷기 여행의 목적이다. 몸의 피곤함, 익숙한 환경에서 이탈, 잘 모르는 사람과의 3일간 여정 등을 통해 자신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때로는 직면하기 싫은 모습일 수도 있고, 반대로 진면목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도 있다. 우리가 걷는 이유다. 아무 사고 없이 서로 아끼고 배려하고 존중하며 즐겁게 걷기를 기원한다. 벌써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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