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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May 01. 2024

해파랑길 무사무탈 완주 기원

'걷고의 걷기 학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아리님과 걷자님은 최근에 조계사 불교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고 있다. 스님 지도하에 체계적인 공부를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나이 들어 필요한 것은 건강, 가족, 친구, 할 일 즉 취미 생활이나 종교 생활 등이라 할 수 있다. 두 분은 심신이 건강하고, 가족과 원만한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고, 길동무들과 함께 걷고, 각자 할 일이 있고, 게다가 최근에 불교 공부까지 하니 참 잘 살고 계신 분들이다. 보기 좋다. 꾸준히 정진하셔서 금생에 깨달음을 얻어 윤회로부터 벗어나길 발원한다.    

  

그제 두 분이 사찰 순례로 봉선사를 다녀오며 아리님이 사진을 찍어 보내주셨다. 자신의 소망을 담아 초를 밝힌 사진이다. 초에 쓴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걷고님 해파랑길 무사무탈 완주 기원”. 나도 불자지만 몇 년간 사찰에 가 본 기억이 없다. 예불을 모신 적도 없고, 참답게 기도를 한 적도 없고, 연등을 밝힌 적도 없고, 연등행사에 참석한 적도 없다. 분명 불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불자로서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 앞으로 불자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보내주신 사진을 보며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고 있다.    

 

초는 자신의 몸을 태워 주변을 밝히는 물건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무지에 휩싸인 눈 뜬 장님들에게 길을 밝혀준다. 어둠은 무지의 세상이다. 빛은 무지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다. 아리님이 수계식을 한 후 받은 법명은 불광심(佛光心)이다. 부처님의 광명을 두루 나누는 마음을 지니고 살라는 의미 깊은 법명이다. 봉선사에서 촛불을 밝힌 마음이 바로 불광심이고, 그 발원인 ‘해파랑길 무사무탈 완주 기원’이 바로 불광심이다. 걷자님이 받으신 법명은 보장화(寶藏華)다. 보물을 찾고 잘 보관해서 주변을 밝히라는 의미다. 불자에게 보물은 바로 불성, 본성, 본래면목을 의미한다. 불성을 본 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두 분의 법명에 모두 밝은 빛을 뜻하는 글씨가 들어있다. 즉 견성한 후 밝은 빛으로 주변을 밝히라는 큰 뜻이 담긴 법명이다. 두 분 모두 주변을 밝히며 살라는 의미고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사찰 참배를 하며 해파랑길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참 곱고 고맙다. 길은 어디에든 있고, 해파랑길을 진행하는 단체들이나 동호회도 많이 있다. 우리 모임은 일반 동호회와는 다르게 규모보다는 서로 아끼고 존중하고 배려하며 절차탁마하는 모임이다. 절차탁마는 옥이나 돌 따위를 갈고닦아서 빛을 낸다는 뜻이다. 우리 모두 불성이라는 보물을 지니고 있다. 다만 그 보물이 욕심, 어리석음, 분노라는 먼지가 쌓여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보물은 어둠 속에 갇혀있다. 먼지를 쓸어내면 보물은 비로소 자체 발광을 하게 된다. 두 분의 해파랑길 무사완주를 발원하는 마음이 바로 먼지를 쓸어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하며 스스로를 밝히고, 우리 모두 각자의 보물을 찾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우리가 길을 걷는 행위도 바로 본성의 빛을 밝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길을 걷다 보면, 그것도 오랜 시간 아주 먼 길을 꾸준히 걷다 보면 저절로 자신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몸은 지치고,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 때가 오는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된다. 처음 보이는 진면목은 참다운 진면목이 아니고 자신이 보기 싫어하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불편한 상황과 사람, 또 자신에 대한 인정하기 싫은 모습 등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통해 자신의 진면목을 찾아갈 수 있다. 마음속 걸리는 장애가 바로 깨달음의 발판이 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좋게 보지 않는다. 불편함이 없는 세상 속에는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편안함의 지속은 언젠가 불편함을 만들어낸다. 오히려 불편함을 직면하고, 그 불편함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습관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부에서 찾는 마음공부의 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 길 위에서 배울 수 있는 살아있는 참 공부다.      


앞으로 해파랑길은 새벽부터 걷는다. 손전등이나 헤드랜턴으로 길을 밝히며 어둠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굳이 먼 길을 바라볼 필요도 없다. 바로 한 걸음 앞의 길을 밝히며 걸으면 된다. 어둠 속에 들리는 파도 소리에 집중하며 걸을 수도 있고, 자신의 발이나 몸의 감각에 집중하며 걸을 수도 있다. 때로는 내면의 자아와 대화를 나누며 걸울 수도 있다. 그리고 감각과 내면과의 대화를 방해하는 잡념이 떠오르면 빨리 알아차리고 다시 감각과 대화에 집중하면 된다. 마음챙김이 걷는 내내 유지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명상이나 수행은 없을 것이다. 잡념이나 망상에 끌려 다니면 안 된다. 또 그 원인을 파악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지환즉리(知幻卽離), 이환즉각(離幻卽覺)’이다. 환상일 줄 알면 빨리 떠나고, 떠나면 바로 깨달음의 세상이 펼쳐진다. 즉 빨리 알아차리고 바로 집중의 대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마음챙김이 걷는 내내 꾸준히 지속되어야 한다. 비록 1초 정도의 매우 짧은 시간이라도 마음챙김은 반복되어야 한다. 1초가 2초가 될 수 있고, 나아가 1분이 될 수도 있다. 찰나의 반복이 바로 영원이다. 봉암사 조실 스님이신 정암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수행은 바닷가에 앉아 작은 바가지를 들고 바닷물을 모두 퍼내겠다는 마음으로 꾸준히 반복하는 것이다.”     


새벽에 전등을 비추며 어둠 속을 걷다 보면 일출을 보게 될 것이다. 침묵 속에서 조용히 오직 한발 앞만 보고 마음챙김하며 꾸준히 걷다 보면 마음속 어둠은 사라지고 일출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걷는 이유다. 벌써 해파랑길이 기다려진다. 두 분이 봉선사에 가서 정성껏 초를 밝히시고 발원을 하신 감동에 겨워 이 글로 감사함을 표현한다. 감사합니다. 두 분 덕분에 우리 모두 무사 무탈하게 해파랑길을 완보할 것입니다. 두 분이 베푸신 공덕으로 두 분께도 부처님 명훈 가피력이 늘 함께 하시길 마음 모아 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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