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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클테디 Apr 15. 2022

넋을 잃고 본 인생노을이랄까

금강산도 식후 겸


아침 7시부터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3박 4일이라는 짧은 시간을 알차게 쓰고 싶어 부지런히 움직였다. 숙소를 나오자마자 하늘을 봤다. 역시 영국의 흔한 겨울 날씨였다. 구름 많이 껴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한 날씨. 우산을 가지고 왔어야 했나 아니면 근처에 사야 하나 고민하면서 일단 아침을 먹으러 갔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사실 호스텔에도 유료로 조식을 제공해주지만 영국에 왔으니 한 번쯤은 잉글리쉬 브랙퍼스트를 먹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스코티쉬 브랙퍼스트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돈을 쓰고 싶었다. 때는 2015년 12월, 런던에서의 짧은 일정 동안 물가가 워낙 비싸서 제대로 외식 한 번을 못해봤다. 그땐 정말 아낄 만큼 아꼈었다. 한인민박에서 조식으로 나오는 시리얼과 토스트로 허기를 달래며 점심으로는 가성비가 좋은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먹었다. 아침과 점심을 밀가루로 배를 채워 허기가 빨리 질 때쯤 한인민박에서 제공하는 석식 시간에 맞춰 모든 일정을 멈추고 한식을 먹으러 갔었다. 그땐 그 저녁 한 끼가 나에겐 힐링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이번엔 가격을 신경 쓰지 않고 제대로 영국식 아침식사를 즐기기로 했다. 원래 가려던 곳이 있었으나 너무 일찍 나오는 바람에 일단 영업 중인 식당을 들어갔고 스코티시 브랙퍼스트를 주문했다.


참고로 베이컨, 소시지, 수란, 베이크드 빈, 버섯, 토마토, 토스트로 구성된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라면 블랙 푸딩, 감자 스콘, 해기스가 추가된 것이 스코티시 브랙퍼스트


먹기 전엔 배부를까 살짝 의구심이 들었지만 다 먹고 나니 든든했다.


처음 먹어본 스코티시 브랙퍼스트는 사실 늘 먹던 거라 새롭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영국에서 이렇게 제대로 된 아침을 먹어본 게 얼마만인가. 배가 안찰 줄 알았으나 의외로 든든하게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역시 사람은 비타민 D가 중요해


아침을 먹고 다시 거리를 나왔다. 숙소를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둑어둑하고 흐려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니 점차 맑아졌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변덕스러운 영국 날씨였다.

 


흔한 에딘버러 길거리 모습


날씨가 좋아 에딘버러의 전경을 한눈에 보기 위해 칼튼힐로 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내에 멀지 않은 곳에 칼튼힐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등산하는 것보다 걷는 것을 좋아해서 선뜻 올라가는 초입에서 잠깐 고민했지만 영국에서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이 얼마나 또 있을까 싶어서 일단 올라가기로 했다. 조금씩 허벅지가 당겨 올 때쯤 머지않아 정상에 도착했다.



올라오니 날씨가 맑았지만 햇빛의 방향이 칼튼힐 쪽이 아니었다. 햇빛에 비친 에딘버러의 풍경을 보고 싶었지만 조금은 실망한 채로 가볍게 한 바퀴 둘러보고 가자고 하던 찰나였다.  



이만하면 충분히 구경했으니 내려가볼까 하는 순간, 서서히 햇빛이 에딘버러 시내를 비추기 시작했고 나는 다시 올라가 한동안 그 자리에서 가만히 전경을 바라봤다.



조금은 차가운 겨울바람과 상쾌한 아침 공기 그리고 따사로운 햇살. 모든 게 완벽했다. 그저 넋 놓고 에딘버러를 구경하면 그만이었다. 별 기대 안 하고 올라왔지만 와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더니 정신이 맑아졌고 신선한 아침 공기에 생기가 샘솟았다. 저 멀리엔 에딘버러 성과 하늘 높이 우뚝 서 있는 스콧 기념탑이 보였다.




다시 크게 한 바퀴 산책을 하기로 했다. 여행에서 날씨가 8할이라고 했거늘. 햇빛을 쬐니 기분이 좋아졌다.



몇 년 전, 바르샤바에서 4박 5일을 있는 동안 한 번도 해를 본 적이 없어서 나모 모르게 힘이 쭉 빠지고 지쳐있었다. 바르샤바에서 브로츠와프로 가는 날, 드디어 날씨가 맑아졌고 쨍쨍한 햇빛으로 다시 활력을 얻기도 했다. 그때 여행하면서 햇빛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햇빛의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시 걸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날씨의 노예라서 날씨가 좋은 날엔 텐션이 높고 흐린 날엔 사색에 잠기곤 한다.


미세먼지 1도 없는 이 청명하고 상쾌한 아침 공기



이렇게 하루의 시작을 집 근처 동산에 올라 상큼한 아침 공기를 마시는 게 얼마만인지. 충분히 비타민 D충전을 하고 나서 하산을 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희생된 스코틀랜드 군인과 선원을 기리는 국립 기념물






칼튼힐에서 하산 후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모름지기 그 나라의 옛 문화와 생활모습을 알려면 국립 박물관을 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지 않았고 쉬어가는 타임으로 일정을 잡았다.



금새 또 흐려진 에딘버러



에딘버러에서의 해리포터 성지순례


에딘버러엔 해리포터 관련 장소가 중간중간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두 곳을 갔었는데 첫 번째는 엘리펀트 하우스


엘리펀트 하우스가 유명한 이유는 당연히 해리포터였다. 조앤롤링이 이 카페에서 자주 해리포터를 집필했다고 하는데 명작의 탄생이 이 아담한 카페라는 게 새삼 놀랐다. 작가는 이 작은 카페에서 해리포터를 집필하면서 전 세계를 마법의 세계로 휩쓸 거라 예상했었을까.


이왕 온 김에 안에 들어가서 구경도 하고 커피 한잔을 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많아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쉽지만 외관만 찍었다.


엘리펀트 하우스를 지나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빅토리아 스트리트였다.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갔던 건 바로 다이애건 앨리 때문이었다. 영화 속 다이애건 앨리는 마법사와 마녀들이 각종 마법 도구를 사는 번화한 상점들이 있는 골목길이며 빅토리아 스트리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 속 해리는 처음으로 마법세계에 들어와 들뜬 마음과 함께 마법 지팡이부터 입학 전 필요한 준비물들을 다이애건 앨리에서 구매하기도 하고 그린고트 은행에 들려 돈을 찾기도 했다.



빅토리아 스트리트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널찍해서 놀랐다. 영화 속 다이애건 앨리는 좁고 조금은 우중충한 분위기였지만 빅토리아 스트리트는 정반대였다. 상당히 밝은 색감과 화사한 조명으로 거리를 비추고 있었고 전반적으로 활기찼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거리 분위기에 한참을 둘러봤다. 영화보다 더 생동감 느껴져 취할 대로 취하던 중이었다.  










이제부터 제 인생 노을은 에딘버러 입니다.


빅토리아 스트리트를 지나 발길 따라 걷던 중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저만치에서 은은한 연보랏빛이 돌고 있었다. 그 순간 정말 아무 망설임 없이 저 빛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점점 빛을 향해 다가갔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오르막 길을 올랐고 오르다 보니 에딘버러 성 앞에 도착했다. 빛은 점점 강렬한 붉은빛으로 진해지고 있었다. 에딘버러 성을 둘러보자마자 나온 첫마디는


와 대박이다.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황홀한 광경에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을 눈에 담기에 모자라 카메라 셔터를 쉴 새 없이 눌렀다. 카메라에 담겨 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정말 내 눈앞에서 지금 보이는 게 맞는 건가.



여태껏 나름 수많은 여행을 해왔지만 이렇게 비현실적인 노을을 본 적이 있던가.



소름이 돋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주변에 있는 수많은 여행객들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다들 각자 노을과 함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마음씨 좋은 외국인 아주머니와 따님이 사진을 찍어주셨다.


가끔 살면서 우리도 모르는 우연한 기회 또는 기막힌 타이밍을 마주할 때가 있다. 보통 우리가 '행복하다'라고 느낄 때 예상되는 좋은 일보다는 예상치 못한 좋은 일에서 더 큰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변수가 일어나고 한 치 앞도 모르는 여행에서는 가끔 이렇게 어쩌다 큰 행운이 올 때가 있다. 그 행운이 날씨일 수도 있고 새로운 인연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여행은 꽤 매력적이다.  



물론 여행을 하면서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여행의 일부이며 아이러니하게도 가끔 지나고 보면 미화되기도 한다. 좋았던 안 좋았던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이 짜릿한 우연함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이야기하고 싶다.








1월 19일 기막힌 타이밍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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