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엉클테디 Aug 04. 2020

때아닌 월동 준비

1일 차 같은 2일 차


어김없이 새벽에 눈이 떠졌다. 다시 시차를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커튼을 들쳐보니 우중충했다. 아직은 새벽이라 그렇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인데 날씨가 좀 맑으려나


잠시 잠이 덜 깬 채로 침대 옆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낯설었다. 자고 일어나면 우리 방일 것 같았다.

새벽이라서 마치 꿈을 꾼 듯한 몽롱한 기분이랄까.


침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발코니

그러곤 다시 잠에 들었다. 보통 때였으면 분명 계속 뒤척이다가 못내 일어나서 외출 준비를 했겠지만 그때와 달리 더 게을러져도 아무 상관없었다. '여행'에 초점을 두었을 때보다 한결 가벼운 기분.


서서히 아침이 되자 알람이 울렸다. 오전 9시쯤이었을까. 배가 고팠다. 일단 한국에서 가져온 한식들을 주섬주섬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라면, 신김치, 볶음김치, 떡볶이, 짜장 떡볶이, 파스타 소스, 닭볶음탕 소스, 누룽지, 유부초밥세트, 인스턴트 미역국과 미소 된장국, 참기름, 일반 고추장, 양념 고추장, 된장, 라면사리까지


총 33박 35일 일정이라 부모님께서 혹시라도 아들이 타지에서 굶을까 봐 비상식량들을 이것저것 챙겨주셨는데 처음엔 라면과 김치만 사기로 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이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저것도 챙기면 좋을 거 같은데 하다 보니 이 정도로 많은 양이 되었다.


캐리어가 무거운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가져온 한식들을 수납공간에 넣으면서 왜 캐리어가 평소보다 무거웠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점점 내 살림을 꾸리는 중



아침은 가볍게 누룽지에 볶음 김치를 먹기로 했다. 뜨끈하고 구수한 누룽지를 먹고 나니 한결 속이 풀렸다.


개인적으로 매번 유럽을 올 때마다 며칠 정도 유럽 물이 안 맞아 속이 더부룩할 때가 많았다. 소화제를 먹다가도 효과가 없을 땐 얼큰하거나 맑은 국물을 먹으면 직빵이라 국물이 있는 한식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혹시나 몰라 전기포트도 한국에서 챙겨 왔다.


방안에 들어와 침대에 털썩 앉은 채로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첫째 날엔 비도 오고 숙소까지 찾아오느라 정신없었는데 다시 보니 침대 옆 창가는 멍 때리기 최적의 장소랄까. 건물 벽에 햇빛이 쨍하게 빛쳤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 잠시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12월이지만 그리 바람이 매섭지 않았다. 동네는 한산했다. 크리스마스 연휴라 다들 가족들을 만나러 본가로 갔는지 인적이 드물었다. 우리 집주인도 본가에 갔으니 브로츠와프가 본가가 아닌 사람들은 아마 각자 저마다의 고향으로 갔을 것이다.

 


환기를 한 김에 이부자리까지 정리했다. 한국에서 챙겨 온 돌돌이로 침대를 한두 번 청소를 한 후 이쁘게 이불을 개고 베개와 쿠션을 가지런히 놓았다. 그러곤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최대한 깔끔하게 배딩을 했다. 스스로 배딩에 만족해하며 사진을 찍었다. 


별게 다 추억하고 싶었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침대커버의 주름이 쫙 펴지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크리스마스이브의 시작은 월동준비부터


첫째 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Bartek이 숙소 안내를 해준 후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테디, 이번 주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서 아마 24일부터 26일까지 모든 마트와 상점들이 열지 않을 거야. 지금은 시간이 좀 늦었지만 내일 근처 마트 가서 필요한 게 있으면 오후 4시 전까지는 꼭 사야 해.  아마 마트들도 크리스마스 때문에 조기 영업 종료를 할 거야. 잊지 마. 꼭 3일 정도의 비상식량을 사놓아야 해.


유럽의 크리스마스는 역시 우리나라와 다르긴 달랐다. 우리는 오히려 카페나 음식점 같은 경우에 크리스마스 시즌이 제일 붐비는데 여기는 대부분의 상점들과 마트가 문을 닫는다니. 유럽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마치 우리나라의 설날과 추석인 셈이라 그런 걸까.


미리 말해줘서 참 고마웠다. 아마 말 안 해줬으면 3일 내내 한식으로 버텼을지도 몰라.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나서 뭐하지 잠시 고민하다가 아 맞다. 장 봐야지. 참 


곧장 책상에 앉아 살 것들을 쭉 적었다. 파스타 면, 피클, 샴푸&린스, 과일, 채소, 쌀, 약간의 간식, 인스턴트 음식 ex) 매쉬드포테이토, 파스타 등등


원래 주식은 쌀이지만 유럽에 왔으니 조금은 현지인처럼 입맛을 바꾸고자 밀가루로 바꿔보기로 했다. 파스타나 빵 위주의 식사가 쌀 위주의 식사보다 배가 금방 꺼지긴 하지만


중간중간 간식들로 배를 채우면 되겠다는 행복한 계획을 세웠다.



샴푸와 린스 같은 경우엔 석회수 때문에 혹시나 몰라  현지 제품을 쓰기로 했다.


가벼운 백팩과 함께 바르텍이 알려준 대로 문을 잠근 후(문 잠그는 게 꽤 복잡해서 몇 번 헤맸다. ) 브로츠와프에서의 첫 일정으로 장을 보러 갔다. 첫날 바르텍이 집 근처에 무엇이 있는지 짧게 투어를 해줬는데 마트 같은 경우 아파트 1층 현관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바로 보인다고 하길래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꽤 가까운 위치에 마트가 있어서 매우 편리했는데 마트 이름은 Biedronka 비에드롱카. 18년도에 폴란드를 짧게 여행하면서 종종 들렀던 곳이라 낯설지는 않았다. 마트 규모는 동네 대형마트 정도로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보다는 조금 더 사이즈가 있는 곳이었다.


폴란드에서 가장 큰 슈퍼마켓 체인점이라 한다.



https://www.biedronka.pl/pl

마트를 들어가기 전에 카트 같은 걸 찾으려 했으나 없었다. 흔한 마트에 카트가 없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뭔가 싶었다. 안에 들어가는 순간 깨달았다. 마트 안 상황은 그야말로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아마 사람들도 며칠간 모든 마트와 상점이 열지 않으니 미리 필요한 걸 사기 위해 왔을 것이다. 살 건 많았는데 담을 무언가가 없었다.


뭘로 담을까 하다가 가져온 백팩에 챙겨 놓을까 하면서도 뭔가 훔치는 것처럼 오해할까 봐 비닐봉지를 몇 장을 뜯어 일단은 이것저것 담았다.


아무리 쇼핑 리스트를 적어 갔지만 양손에 쌓여만 가는 비닐봉지들로 그야말로 손이 부족한 상황. 그래도 꼭 필요한 것들을 챙기긴 챙겼지만 좀 더 여유롭게 장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파스타 면, 빵, 과일, 야채, 샴푸, 린스, 맥주 등등. 계산대에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얼마쯤 나오려나 대충 어림잡아 계산을 해봤다. 딱 보기엔 3만 원은 충분히 넘어 보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2만 원밖에 안 넘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빼곡하게 적힌 영수증을 보고 나서도 믿을 수 없었다. 폴란드 물가가 싸다고는 익히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저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대로라면 한 달을 꽤 풍족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1 PLN = 300원 정도니까 대략 20,000원


집에 와서 다시 하나씩 꺼내보니 충분히 3일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엔 가볍게 빵을 먹고 점심엔 파스타를 먹거나 한식을 먹고 저녁에 맥주하고 어울릴 만한 안주를 만들어 먹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쌀을 샀으니 만사 오케이였다.



샴푸&린스, 사과 4개, 토마토 3개, 빵 4개 피클, 파스타 면, 쌀, 맥주 2병, 견과류, 요거트 2개 그리고 간식으로 쿠키


넣을 건 넣고 정리를 한 후 바로 가계부를 작성했다. 가계부를 작성하면서 영수증에 있는 몇몇 폴란드어 단어들을 찾아 적었다. 예를 들어 맥주 Piwo, 쌀 Ryż, 토마토 Pomid, 사과 jabłko. 아주 기본적인 단어지만 슈퍼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 만발의 준비를 했다.


예전에 여행했을 때 슈퍼에서 산 거라곤 물과 맥주뿐이었지만 해외에서 살림살이를 위해 장을 처음이라 재밌었다. 천직이 살림꾼이려나. 덧붙여 이렇게 꼼꼼하게 가계부까지 작성하는 것도 처음이라 새로웠다.



정말 해외에서 사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으로 폴란드 마트에서 살림을 위해 장을 본 소감은 다음과 같다. 폴란드 마트는 한국의 어느 평범한 마트와 달리 유제품과 육류 제품이 정말 저렴했고 채소와 과일 또한 신선해 보였고 저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술이 저렴했다. 500ml 병맥주가 천원도 안 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물도 저렴하지만 맥주가 저렴하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여러 가지 빵이 진열된 보관함(?)이 있었고 손님이 직접 담을 수 있게끔 비닐장갑과 종이 포장지가 있었다. 빵 종류도 다양하고 가격도 500원이 안 넘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출처 http://www.soshe.pl/2017/04/kupujesz-buki-w-supermarkecie-musisz.html#




마트에 다녀온 후 깨달았다.

폴란드에서의 한달살기가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걸.




가계부를 작성하고 나서도 엑셀로 만든 자동 계산식 가계부도 입력하면서 소소한 재미를 찾기도 했다. 기입을 하면서 느낀 건 이렇게 꼼꼼하게 기록하다 보면 나중엔 타지든 타국이든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물론 한 달이라는 시간이 많은 걸 변화시킬 수 없지만.



일일결산과 지출비용(누적) 값을 만들어 조금 나의 씀씀이를 알아가고자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였지만 딱히 막 특별하진 않았다. 장을 본 게 전부였다. 다시 집에 와서 정리하고 시차로 인해 낮잠을 자다 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고 저녁 먹자마자 피로 누적으로 얼른 잠에 들어버린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날이었지만 월동 준비는 마쳤으니 만사 오케이였던 하루.







저녁으로는 약간 해비하게 파스타












12월 24일 월동 준비 완료








매거진의 이전글 연말에 액땜이라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