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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keSummer Dec 16. 2022

내년에 마흔두 살 재택근무자 사용설명서

그녀의 좌충우돌 재택근무 고군분투기 

   자 여기 좀 앉아봐.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여기 내년에 마흔두 살이 되는 여자 사람 재택근무자가 있어. 그녀를 향한 내면의 외침이 시작된다. 무슨 소리냐고 그냥 아무 말이나 하는 거야. 어색하잖아.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할 거야. 잘 부탁해 그녀를. 근 41년간 옆에서 봐온 최측근으로서 이런 얘기를 글로 풀어보고 싶었어. 앞으로 100세 시대 남은 60년 동안 잘 데리고 살 수 있게 사용설명서를 건네볼게. 자 받아 적어. 그녀는 그냥 재택근무자가 아니야. 눈동자에 진주알을 가지고 있는 진정한 원석이지. 어디 한 번 그녀에 대해 낱낱이 파헤쳐 볼까.      




  첫째, 매일 따뜻한 커피를 준비해줘.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점 세 개다). 그녀의 취향은 다양도 하지. 어느 날은 깔끔한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먹기도 해. 그러면 지음 커피에서 스페셜티 에티오피아 원두를 구비해둬. 100g에 11,000원이야. 일반 핸드드립 커피 한 잔에 5,500원인 거 생각하면 5번은 내려 먹을 수 있으니 괜찮지? 그녀는 끝 맛에 민감해. 목 넘김이 부드러워야 마시거든. 그래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는 비싼데 끝 맛이 별로라 안되고, 메가 커피는 싼데 끝 맛이 별로라 더더욱 안돼. 그게 무슨 논리야. 아무튼 최근에 뚫어놓은 인스트로우 커피숍 아메리카노와 라떼가 괜찮으니까 체크해 놓고. 알았지?    


 

   둘째, 마우스는 로지텍 MX VERTICAL로 준비해줘. 유리 손목을 가진 대한민국 어머니로서 공감할 거야. 왜 이 마우스를 써야 하는지. 물론 인터넷에서 사면 2~3 만원 더 저렴하겠지만 이마트에서 만져보자마자 사고 싶어 할 거야. 옆에 남편이 무슨 마우스를 13만 원짜리를 사냐며 돈지랄한다고 할 거야. 그럼 조용히 와서 화장실로 데려가. 아니 그 자리에서 참 교육을 해도 돼.      



   셋째, 필라테스 1:1 수강권을 등록해줘. 20회 등록하면 할인받아서 100만 원이야. 1회당 5만 원이지. 잠깐만.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냥 동네 공원 가서 한 바퀴 휙 돌고 오면 될 것이지. 아주 유난을 떤다 떨어. 어머 미안. 이건 남편의 마음의 소리야. 직접 듣진 않았지만 눈동자에서 다 읽히잖아. 15년 이상 같이 살면 독심술 쌉가능 하거든. 아무튼 이제 풀타임으로 돈을 버는 이상 건강관리는 필수야. 누가 뭐래도 그녀의 선택을 응원해.     



   넷째, 식기세척기가 시급해. 2년 전에 이사 온 아파트는 남향이라 좋은데 수압이 너무 낮아. 결국 일 년도 못 쓰고 당근에 반값에 팔게 되고 이렇게 매일 후회할지 몰랐지. 그렇다고 수압이 높은 곳으로 이사를 갈 수도 없고. 안방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면 거실 화장실에서는 샤워를 못하니. 맞아. 그녀 집에 화장실 두 개라고 자랑하는 거야.      



   다섯째, 아침 산책 30분, 점심 산책 20분은 필수로 세팅해줘. 알람을 맞춰놓으면 더 좋지. 아침에 설거지하고 빨래 널고 나서 바로 출근하지 말고, 아파트 단지 내 운동기구 크로스컨트리로 다리 좀 200번 찢어주고, 허리 돌리기에 매달려서 팔 하고 어깨죽지 좀 스트레칭하라고 해줄래. 그렇게 안 하면 목에 담 걸려서 왼쪽 입술부터 얼얼해진다고 제발 좀 전해줄래. 에헴. 흥분했네. 뭐 그렇단 얘기야. 동네 산책을 하다 보면 어느 커피숍이 일찍 여는지, 어디에 아이스크림 할인점이 있는지, 길냥이들은 어디서 빵을 굽는지 알게 될 거야. 아이스크림 할인점은 나중에 아들 뒤지게 혼내고 나서 미안한 마음에 빠삐코 초코맛을 잔뜩 사러 갈 때 유용할 거야. 하나에 600원이라 편의점보다 400원 저렴하거든.  


    

   여섯째, 컬리를 자주 이용하라고 알려줘. 오후 다섯 시까지 일하고 애 밥 챙겨서 먹이고, 빨래하고 설거지까지 하려면 장 보러 가기가 힘들 거야. 예전처럼 오전에 한살림 오픈런해서 채소, 계란, 반찬거리 다 쓸어오고 그럴 수 없어. 대신 컬리를 다운받아. 그게 말이야. 새벽 배송하시는 기사님들의 처우가 좋지 않다는 보도를 들었어. 그래서 쿠팡은 사용하지 않지만 남편이 프리미엄 회원이야. 남편은 쿠팡을 써라. 보라색을 좋아하는 재택근무자는 컬리를 쓸게. 죄책감을 무마해보려고 아무 말 대잔치 하는 거야. 정부에서 이런 부분을 빠르게 법규를 만들어서 기사님들을 법적으로 보호해줬으면 좋겠어. 소비자가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기쁘게 쇼핑할 수 있게 정부에서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아들은 갑자기 자기 전에 얘기해. 엄마 내일 아침에 누룽지 끓여주세요. 그래. 이렇게 하면 되지. 밥을 새로 해. 그래서 프라이팬에 밥을 얇게 펴서 누룽지를 만들 수 있어.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성질이 나겠지. 그럼 애한테 화를 내겠지. 그럴 땐 조용히 컬리를 누르고 황동판에 구운 찹쌀 누룽지 1kg를 시켜. 평화가 찾아올 거야.      



   일곱째, 이게 마지막이야. 너무 길어지면 당신도 다 챙기기 힘들잖아. 글쓰기 수업 있으면 무조건 결제하라고 해. 분명히 망설일 거야. 일 적응하기도 바쁜데 글쓰기 수업까지 어떻게 해. 그럼 그냥 따라가기만 하라고 해. 3년 전에 온라인 필사 모임과 글쓰기 수업으로 새로운 측면을 맞이 한 것처럼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응원해줘. 응원은 외부에서 오는 거니까, 열심히 격려하고 지지해줘. 그녀가 원하는 건 그게 전부야. 




   그녀를 잘 부탁해. 순수한 영혼과 맑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내년에 마흔두 살인 재택근무자는 아마 혼잣말을 계속하면서 일을 하고 있을 거야. 잘 나가던 은행을 그만두고 15년 만에 얻은 풀타임 직장이니 얼마나 애지중지 하겠어. 인서울 안 한(으로 쓰고 못했다고 할게) 지방대 장학생 출신의 설움을 하루하루 거북목으로 일하면서 풀어내는 거야. 인생은 참 재미있지. 매일매일 자신을 끔찍이도 혐오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건 또 한 순간이더라. 그래서 인생인 존버인 거야. 존나 버티던, 존중하며 버티던. 너무나 소중한 거야. 재택근무자한테 사랑한다고 전해줘.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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