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화 Mar 31. 2022

열두 살에 소비 요정이 된 소화

에세이 드라이브 6기 - 키워드: 용돈

Q. 용돈을 많이 받았던 게 소비 요정이 되는 데 영향을 끼쳤나.


A. 음, 글쎄. 용돈이 부족한 적은 없었다. 기억하는 한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큰돈은 아니어도 고 나이 때 필요할 만한 짤랑이들은 늘 충분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한 탕, 분식집에서 두 탕 하고도 오는 길에 병아리도 사들고 왔던 초딩 플렉스. 엄마 아빠는 용돈에 꽤 후했다. 동시에 나는 악착같았다. 열 살에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를 너무 감명 깊게 읽은 탓이다. 열두 살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키라가 제시하는 용돈 벌이는 너무 미국스러운 나머지  -잔디 깎기나 레모네이드 만들어 팔기- 적용이 쉽지 않아 초조했다. 그래도 열심이었다. 빨래 개기 같은 걸 대애충 돕고 뻔뻔하게도 오백 원 천 원씩을 잘도 요구했다.(웃음)


물론 그렇게 코딱지만큼 모으는 것보다 명절을 기다리는 게 늘 빨랐다.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이모에 더해 가끔은 나랑 무슨 관계인지 잘 모르겠는 어른도 용돈을 몇 만 원씩 턱턱 안겨 주셨으니까. 엄마가 나중에 주겠다며 가져가려는 시도를 매년 매 명절마다 했지만 나는 한 번도 속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야물딱지게 복주머니를 차고 가서 지폐 한 장 한 장 꼭꼭 접어 품에 안고 있었다. 엄마가 아무리 꼬드겨도 입을 앙다물고선 고개를 설레설레. (그때는 엄마가 사촌동생들한테 내놓은 돈이 돌고 돌아 다시 나한테 오는 것이라는 명절 용돈의 흐름을 잘 몰랐다. 엄마 미안.)


그렇게 악착같이 굴고도 열두 살에 부자가 되지는 못 했다. 소비 요정 인터뷰니까 결론이 뻔하긴 하지만.(웃음) 돈은 버는 것보다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는 진리를 못 깨우친 탓이다. 맞다. 겨우 열 살 남짓 먹었을 때지만 나는 이미 완성형 소비 요정이었다. 유난히 문구류에 집착하여 주 쇼핑 무대는 동네 문방구. 문구계의 얼리어답터로서 새로 나온 지우개나 일본에서 수입된 펜은 무조건 샀고, 하등 쓸데없고 그래서 더 귀여운 캐릭터 아이템들은 눈에 하트가 뿅뿅 박인 채 샀고, 학교에서 필요한 각종 파일철이며 노트도 매 학기 새로 샀고, 스티커는 보관용 하나 사용할 거 하나 두 개씩 샀고...... 문방구에서 뭘 샀는지 얘기하는지보다 뭘 사지 않았는지 얘기하는 게 빠르겠다. 나는 동네 문방구에서 나름 큰손이었고 가끔 씩씩하게 길을 나서 조금 멀리 떨어진 옆 학교 문방구로 원정도 갔다. 거기 가면 우리 반 애들은 없는 희귀템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는 사이사이 떡꼬치 하나 슬러시 하나씩 사 먹으면 그것이 바로 YOLO 라이프요, 모을 돈이 어딨단 말인가.


중딩 때도 고딩 때도 심지어 대딩 때도 변하는 건 없었다. 용돈은 부족하지 않았고(부모님 감사합니다), 특히 대학생 땐 과외를 빡세게 해서 한 달에 부수입이 백오십도 생기고 그랬었다. 그것도 다 내 용돈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그게 '근로소득'으로 느껴지지는 않고 그냥 '용돈벌이'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여간 문구점 플렉스를 하던 초딩은 넉넉한 용돈과 함께 무럭무럭 자라 점점 소비의 스케일을 키워갔다. 옷도 사고 신발도 사고 책도 사고 여전히 문구도 사고, 강아지 장난감도 사고 mp3도 사고 pmp도 사고 참 많이도 샀다. '이것이 꼭 사야 하는 물건인가?' 같은 비판적 사고는 1도 없었다. 꼭 사야 하는 물건이면 당연히 사는 거고, 소비의 마약 같은 즐거움은 '꼭 안 사도 되는 데 그냥 갖고 싶은' 물건을 사는 데서 폭발하는 거니까. 특히 귀여운 거에 맥을 못 춰서 '귀여워!'를 연발하며 돈을 흩뿌리고 다녔지.


물론 용돈이 너무 넉넉한 나머지 제가 소비 요정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이건 다 용돈 때문입니다-라고 결백을 주장하긴 좀 찔린다. 나만큼 용돈을 받고도 짠돌이가 된 사람을 하나 알기 때문이다. 내 남동생. 같은 돈을 (가끔은 장손이라고 더 많은 돈을) 받았지만 걔는 그걸 다 모았다. 명절에 받은 돈도 엄마한테 다 맡겨서 엄마가 그걸 한 통장에 넣어줬는데, 그 돈이 몇 백이 넘었다고 했다. 중학교 때쯤 그 사실을 알고 '내 통장은 어딨어?!' 했을 때 엄마의 그 어이없다는 눈초리란. 넌 네가 다 가져갔잖아. 그랬죠, 제가 다 가져다가 문방구 아저씨한테 드렸죠. 핫트랙스에서도 많이 썼고 아트박스에서도 썼고요. 그러니까 용돈과 소비 요정 탄생이 상관관계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난 운 좋게 용돈이 많아서 다음 단계로 진화를 빨리한 소비 요정이었을 뿐이다. 후천적으로 강화되었을 뿐, 씨앗은 선천적으로 존재했던 게 아닐까나.




이제는 아무도 내게 용돈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명절이면 어른들 용돈 드릴 계산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나이가 되었다. 어릴 땐 그저 엄마가 은행 들리기만 하면 돈이 무한정 생겨나는 줄 알았는데, 돈이라는 게 그렇게 퐁퐁 솟아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너무 잘 알게 되었고. 돈 버는 일에 얼마나 치사하고 꾸질꾸질한 구석이 많은지도. 그렇다고 20년 간 진화해 온 소비 요정의 기운이 어딜 가는 건 아니라서, 아직도 내 친구들은 가끔 혀를 내두른다. 넌 정말 이 구역의 소비 요정이구나, 하고. 남들 입으로 그런 소릴 들으면 어쩐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돈 쓴다는 것 같아서 쬐끔 민망해지는 거다. 그러면서도 사실 입이 근질근질한 게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야 이건 별 것도 아냐. 사실 나 오래 쉬어서 레벨이 쭐어든 거야. 왕년에 말이야, 내가 용돈을 받던 어린애였을 때는 말이야~  


아니 진짜 요즘 같이 소비 진작이 필요한 시대엔 그런 책 하나 써도 되지 않나요.

열두 살에 소비 요정이 된 소화! 뒷일일랑 잊고 일단 쓰면서 행복해지는 노하우 대공개!




(2020.05.18)

*제목은 뻔하지만 '열두 살에 부자가 된 키라' 오마주입니다. 키라 언니 존경해!

매거진의 이전글 육개장 한 그릇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