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의 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화 Dec 18. 2022

새벽 퇴근길의 인연

위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밤 열두 시가 넘은 늦은 퇴근길. 낮에 한참 내리던 눈 때문인지 평소보다 한참 오래 택시를 기다렸다. 이 어플 저 어플 바꿔가며 아무리 호출을 눌러봐도 수락되는 게 하나도 없어 동동거리길 거진 30분. 이러다가 정말 오늘 회사에서 자게 생겼어. 무서운 예감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을 때쯤에야 겨우 한 대가 잡혔다. UT로 잡은 모범택시였다.


중간에 취소되는 일이 있을까 걱정하며 얼른 내려가 택시를 기다렸다. 곧 도착한 택시는 택시라기보다는 구명정의 느낌이었달까.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느낌을 가득 담아 기사님께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고 기사님의 첫마디.


"오늘은 몇 번이나 호출 눌렀어요?"


띠용. 그제야 방금 어플에 떴던 기사님의 얼굴과 성함이 어딘가 익숙했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택시가 잡혔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느라 크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처음 만나는 기사님이 아니었다. 지지난주쯤, 비슷한 시각에 퇴근하던 나를 태워주셨던 기사님. 그 기사님과의 재회였다! 








그날도 한참만에 택시를 잡았었더랬다.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 내려갔는데, 내가 예약한 택시 앞으로 어떤 취객 두 명이 먼저 다가섰다. 따블을 줄 테니 본인들을 태워달라고 소리를 치며. 그분들이 예약자인 줄 알고 가까이 다가서셨을 기사님은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고 나는 그 사이로 얼른 쏙 택시에 올라탔다. 기사님, 제가 예약했어요. 취객이 아니라 멀쩡한 손님이라는 게 반가우셨는지 기사님도 나를 반기며 바로 액셀을 밟으셨다. 참으로 소란스러웠던 출발. 그렇게 시작된 동행이었던 탓으로 자연스럽게 말이 이어졌었다. 


기사님이 먼저, 최근에 취한 손님을 태웠다가 크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으셨다고 말문을 여셨다. 아까 그분들이 예약자인 줄 알고 태울 뻔하셨다고. 그렇게 되었다면 나 역시 큰일이었으므로 나도 격하게 동의했다. 몇 번만에 겨우 잡은 택시인데 눈앞에서 빼앗기는 줄 알았다고. 그랬더니 기사님이 호출 몇 번만에 택시가 잡혔냐고 물으셨고, 나는 한 다섯 번도 넘게 눌렀던 것 같다고 대답했고, 기사님은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셨다. 늦은 시간에 퇴근하는데 택시도 잘 안 잡혀서 어떡하냐면서. 그리곤 다른 택시 앱 이것저것을 비교하시며, 요즘 기사님들이 제일 많이 쓰는 어플을 추천해주시기도 했다. 


보통 때의 퇴근길에는 피곤에 절어, 에어팟을 끼고 택시에 타선 바로 눈을 감는 편이지만... 슬그머니 에어팟을 빼낸 채 나도 대화에 집중했다. 그게 그냥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조용히 가고 싶은데 기사님이 자꾸 말을 건다고 짜증스럽게 느꼈을 것 같은데. 큼큼 괜한 티를 내며 말을 끊었을지도 모르고. 기사님이 워낙 정중하게 말씀을 하시는 탓인지, 아니면 그냥 말씀을 잘하시는 탓인지, 나도 모르게 대화에 집중한 채 적절한 리액션을 끊임없이 꺼내놓게 되었다. 


하루 종일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날짜가 바뀌고 나서야 퇴근하는 길인데, 어째 여기서도 사회생활 비스무리한 걸 하고 있는 것 같네. 잠깐 그런 현타가 들기는 했지만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대화도 즐거웠고. 그렇게 삼십 분 내내 떠들다가 집에 도착했었다. 택시에서 하나도 쉬지 못한 거나 다름없었지만 집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그렇게 생각하고 짧은 인연을 지나쳤었다. 


그랬는데, 그 기사님도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니. 

그리고 유난히 택시가 잡히지 않았던 오늘, 나를 태우러 와주셨다니! 








"내가 호출 뜨자마자 손님인 거 바로 알고 수락했어요. 오늘은 바로 잡히지 않았어요?"


나를 기억하고 바로 수락을 누르셨다는 기사님이 반가워 어째 잠깐 코 끝이 찡해졌었다. 바로 잡히지 않았냐며 기대감 어린 얼굴로 쳐다보시는 눈빛에도. 택시 경력만 40년이 넘으셨다는 나이가 지긋하신 기사님이라 그런지, 어째 손주를 오래 기다린 할아버지를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요 기사님, 저 오늘은 진짜 스무 번도 더 눌러서 겨우 잡혔어요. 어린애 투정 같은 걸 했더니 기사님은 이번에도 혀를 츳츳. 저번에 써보라고 한 앱 다 써본 거냐며 걱정 어린 타박도 하셔서, 그것도 다 써봤는데 오늘따라 진짜 안 잡혔다고 나도 계속 투정을 했다. 


"기사님 덕분에 살았어요. 아니었음 저 오늘 진짜 집에 못 가고 회사에서 잘 뻔했어요."


물론 그 투정은 다 내가 지금 기사님께 얼마나 감사한지를 전하기 위한 거였고. 나를 기억하고 바로 잡아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조난당했다가 구원자를 만난 사람처럼 진심을 담아 얘기했더니 기사님은 그제야 허허 웃으셨다. 마침 본인이 근처였어서 다행이라며. 


인연이 이렇게 다시 닿기도 하는구나. 또 한 번 이야기를 내내 이으며 집에 왔다. 도착해서는 그간 택시 기사님에겐 한 번도 건네본 적 없는 종류의 인사도 건넸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나중에 또 봬요. 

택시 앱이라는 게 그렇게 내 맘대로 작동하는 건 아니니 기사님과 또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인연이 신기하고 반가워서 마음이 통통 튄다. 어딘가 반짝거리는 그 마음으로, 허덕허덕 보낸 지난한 한 주를 가볍게 마무리. 위로는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