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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Feb 12. 2023

삼천아, 새비야, 희자야, 영옥아

최은영 <밝은 밤> 


내게는 지난 이 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밝은 밤』을 썼다. (중략) 창밖으로 보이던 눈쌓인 벌판과 한없는 고요함. 그곳에 앉아서 나는 『밝은 밤』을 쓰기 시작했다. 그 기분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날 나는 다시 쓰는 사람의 세계로 초대받았고, 그곳에서 삼천이를 만났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또 책을 오래 읽지 못했다. 그래봐야 6개월 남짓이지만, 책을 읽지 않을 때면 으레 그렇듯 매우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턱끝까지 차있던 밭은 숨을 드디어 몇 번 걸러냈다. 갈증에 오래 시달린 양 허겁지겁 책을 집어 들었다. 다시 시작되는 길의 초입에서 어떤 책을 만나게 되는지는 늘 중요하다. 이야기가 끝나고, 그중 하나가 이 책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무슨 이유였든 작가도 오랜 시간을 버틴 끝에 쓴 책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눈쌓인 벌판과 한없는 고요함. 북적이는 지하철 속에서 스마트폰으로 이 책을 겨우 읽어내면서도 내가 느꼈던 안온함도 거기 있었고. 운명론자는 모든 만남을 늘 이런 식으로 매듭짓기 마련이지만. 






백 년의 시간을 감싸 안으며 이어지는 사랑과 숨의 기록.


사람에게서 상처받고 숨어든 지연이 그곳에서 관계가 소원했던 할머니를 만나고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어 백 년을 넘나 든다. 할머니의 사진 속에서 제 얼굴과 꼭 닮은 증조할머니를 만나면서부터.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지연이 찾아내는 건 어쩌면 제 자신이다. 억눌린 채 삶을 버텨오며 점점 잃어가던, 혹은 처음부터 아예 구성해내지 못하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 이때껏 모르고 살았지만, 백정의 딸로 태어나 어두운 시대를 겨우 살아낸 증조할머니의 삶도 자신을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던 새비 아주머니의 삶도. 명숙 할머니도, 희자도, 봄이도. 그들의 사랑도, 우정도, 아픔도, 슬픔도. 


살아남는 것 자체가 일이었던 세상 속에서도 다정한 마음들이 빛난다. 서로를 아끼고 애달파하는 마음 때문에 자주 먹먹해졌다. 그렇다고 모든 물결을 거스를 용기는 없었던 보통 사람들이고, 사랑만으로 온전히 구원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더더욱 그랬다. 부서지고 때로 원망하면서도 어떻게든 한 번 더 끌어안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는 마음이 뭔지 알아서. 


그들은 그렇게 서로 아끼며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그런 식의 삶은 없다. 우리는 모두와 이별하고 사랑은 이별을 더 힘들게 한다. 마음에 깊이 들어왔던 사람일수록 긴 생채기를 남기며 떠나간다. 헤어지는 길에 더 투정을 부리고 섭섭한 마음을 부풀려 상처를 주기도 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런 후회로 끝나버리는 것들은 보통 다 사랑이다. 원망하게 되는 것도 사랑. 아파서 무너지게 하는 것도 사랑. 


그러니까 결국은 다 사랑. 웃음이 넘치던 순간은 찰나였지만 그 빛에 기대어 밤을 버틴다. 내 다 안다, 다 안다. 더 말하지 않아도 안다.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끼리 울음 섞인 눈길로 서로를 쓰다듬는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므로 비로소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순간. 그렇게 불어넣어진 작은 숨들이 모여 삶을 지탱한다. 지탱해 왔고. 오고 가는 이야기를 다시 엮으며 지연이 느낀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사람 때문에 지쳤다가도 결국 거기서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 것. 나는 어쩌면 늘 누군가의 단면만을 보고 있는 것이니까. 







삼천이와 새비. 영옥과 희자. 미선과 명희. 명옥 할머니와 지연. 지나치게 의도적으로 보일 만큼 남자들의 존재가 지워진 이야기였다. 가부장적 악역이 아니면 힘없는 주변인이 되어 사라진 남자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그 빈 공간을 채워내는 여자들의 이야기. 그러니 지난한 역사를 끌고 온 페미니즘적 이야기로 읽을 수도, 내도록 엄마를 원망하다가 드디어 이해의 실마리를 찾은 딸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겠다. 4대에 걸쳐 이어지는 삶의 기록이라고도, 사랑보다 애틋한 우정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아니면 무너졌던 한 사람이 사금파리를 주워 붙여 재건을 시도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고, 그 모두라고 읽을 수도 있다. 


이틀에 걸쳐 책을 읽으면서 나는 사실 그냥 이 이야기를 읽었다. 오랜만에 연 소설이어서 그랬는지 이 이야기가 유난히 나를 끌어당겼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지연의 마음과 비슷해져서 자꾸만 궁금해하며 읽었다. 그래서 새비 아저씨는요, 새비 아주머니는 어떻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그들은 다시 만났나요? 이야기 자체에 매료되어 보채기에 바빴다. 피곤한 밤을 꼬박 지새우면서 책장을 넘겼으니 다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 힘을 주었고. 너무 이상주의적이라고 투덜대면서도... 결핍에는 과잉이 필요한 법이라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만큼이나 사람이 책을 만나는 데도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 적확한 시기에 만나 내게 약이 되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미묘하게 그 지점을 빗나가버리는 경우도 많다. 어째 다시 운명론자 같은 이야기지만. 무언가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는 때에 그에 대해 나름의 답을 주는 책을 만나는 것만큼 반가운 일이 있을까. 그렇지만 영 반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요즈음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잔뜩 투영하며 읽으니, 나는 무슨 책을 읽어도 그 답을 찾아 행간을 샅샅이 헤매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이야기의 마력은 거기에 있는지도.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도. 그 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남편이 저버린 것은 그런 내 사랑이었다. 내가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가 잃은 건 그런 사랑이었다. 누가 더 많은 것을 잃었는지 경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경쟁에서 나는 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날 그 자리에서 불안을 느꼈다. 경계하지 않을 때, 긴장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관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어떤 순간을 즐길 때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 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 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 보다 생각할 때. 


나는 어머니가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떨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니는 일평생이 그런 식이었죠.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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