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정국
버치 중위가 남긴 박스들을 보면서 전율을 느꼈다. 이미 미군정의 자료, 그중에서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주한미군 사령부, 하지장군 문서철(RG 388)>에 공개된 문서들도 있었지만, 버치 중위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었던 자료들 역시 적지 않았다. 그중에는 당시 한국의 정치인들과 소통했던 자료들이 많았다. 명함부터 편지, 사진, 메모 등 하나하나가 다 보물 같았다. - 박태균
버치 문서에 언급된 핵심 정치인은 여운형, 김규식, 김구, 이승만이다.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은 버치가 주도한 좌우합작위원회의 대표였다. 버치는 두 사람을 존경했다. 흥미로운 점은 김구와 이승만을 극우에 가깝게 인식했다는 것이다. 김구를 좌파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근현대사 인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다.
여운형은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교과서를 통해서 알려질 수 없었다. 근현대사를 찾아 읽기 전에는 모르는 인물이었는데 해방정국 기준으로 김구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객관적인 역사 인식을 위해서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미군정은 한국을 수월하게 이끌기 위해서 국민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여운형을 포섭하려 했다. 그 전략 중 하나가 CIA의 전신이던 CIC가 여운형의 친일 행각을 밝혀내어 협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심문을 받은 패전국(일본) 고위직 인사들은 하나같이 여운형을 칭찬하며 그의 친일을 부정했다. 버치문서에는 여운형 관련 자료가 유독 많다. 뒷조사를 할수록 버치는 여운형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여운형은 김규식을 한국의 지도자로 추천하는 편지를 버치에게 보내기도 했다.
여운형과 김구는 암살을 당했고 김규식은 6.25 때 납북됐다. 미군정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싶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언급이 있다. 최근에 이승만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납득하기 어렵다. 교차검증을 할수록 이승만의 만행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미군정에게 받은 반공 활동 자금을 사유화했다는 기록이 있고, 긴급자금으로 받아낸 돈이 1년 동안 이승만의 개인 계좌에 방치됐다는 감사 결과도 있다. 출금이 확인된 소액은 이승만의 자택 수리비로 쓰였다고 한다.
버치는 맥아더가 이끄는 도쿄의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갖고 있었던 이승만에 대한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또 다른 이유로는 영어 소통과 가짜 뉴스를 꼽았다. 미국에서 공부를 한 이승만은 미군정과 직접 소통이 가능했지만 김구는 그렇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승부가 났다는 견해다. 미군정 시기의 통역은 고급인력이었고 오역과 조작에 속수무책이었다. 국민들은 가짜뉴스를 가려낼 수단도 없었다. 동아일보의 모스크바 삼상회의 신탁통치 오보는 한국의 정치사를 뒤바꾼 사건이었다.
한국인들은 사실과 사설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 3개의 신문이 법을 어겨서 정간이 되었는데, 최근 서상천에 의해서 현대일보가 문을 열려고 한다. 그는 이승만 계열의 극우파다. 그 역시 사령관에게 적대적이며, 좌파만큼이나 바람직하지 않다. - 1947 1월 7일 『신문에 대한 정책』(버치 문서 Box 4 - E - 211~213)
이승만이 워싱턴의 직접적인 위임을 받아 귀국한다는 거대한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이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이승만의 그룹은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에게 엄격한 경고를 하려 하고 있다. 그 경고는 현대일보와 몇 개 지방신문에 실렸다. 이승만은 반미적 선동을 계속하고 있다. 미군정이 한국을 팔아넘기려고 하는데, 자신들이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한다. 이승만이 도착하기 전에 그는 미국의 정책 변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한국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언급한 마샬 몰로토프 서한과도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성명을 사령관이 직접 내야 할 필요가 있다. - 1947년 4월 19일 『이승만의 외교적 성공』(버치 문서 Box 3 - C - 51)
한국 정치사의 기괴한 서막이었다. 2차 대전 종식 후 미국은 한국 외에도 신경 쓸 지역이 많았다. 버치 문서에는 본토(미국)의 부실한 지원을 불평하는 내용이 있다. 대표적인 문제는 인력 부족이었다. 말도 안 통하고 한국 문화에 문외한인 미국인 수십 명이 시와 도를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임무였다. 게다가 한국에 배치된 미군 대부분은 행정직이 아니었다. 전투기 조종사에게 시장 도지사 자리를 맡긴 셈이다.
미군정은 한국을 이해하지 못했다. 친일 경찰을 '식민지 시기에 직업이 경찰이었던 한국인' 정도로 인식했다. 사실 올바르게 인식했다 하더라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미군의 인력도 부족했을뿐더러 한국에 상주하고 있는 미군 가족의 안전을 포함한 치안유지를 위해서는 친일 경찰의 도움이 절실했다. 미군정은 친일 경찰에 의지하고, 친일 경찰은 이승만에게 의지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친일 경찰의 횡포가 끊이지 않았고 버치는 이승만에게 이 문제를 건의했다.
이승만의 통치 철학은 내가 기억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사건을 통하여 잘 드러난다. 한때 내가 볼셰비키 적만 아니라면 한국에 있는 모든 사람과 협력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조언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워낙 협력에 대하여 확실한 신봉자입니다. 내가 거듭해서 말하고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지금 다시 말해줄게요. 내가 원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나를 따라 하는 겁니다."
또 다른 한때 내가 대한 민청에서 일하는 정치적 살인자와 착취자로 구성된 이승만의 대리인들이 이승만의 원칙에 대한 충성하에 자신들의 개인적 지하 감옥들에서 일련의 고문 살인을 저질렀다고 이승만에게 따졌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어쩌라는 거예요? 내가 그들의 애국심을 규탄해야 되나요? 죽인 사람들은 다 좌익 놈들이었어요!"
- 박상엽(Park Sang Rhup)의 추방심리 (1952년, 버치 문서 Box 3 - s - 36~43)
친일 경찰과 청년단의 만행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좌익 5명을 잡는 과정에서 소시민 한 두 명이 희생된 수준이 아니라는 말이다. 소(小)를 위한 대(大)의 희생이었다. 깡패 같은 친일 경찰은 상인과 기업인들에게 기부금 명목으로 돈을 뜯었고 청년단의 광기는 폭도와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은 자신의 편이 아니면 '공산주의자'라는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좌익과 자신을 따르지 않는 세력을 동시에 때려잡는 묘수였다. 이러한 전략은 한국 정치사의 클리셰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친일 경찰과 지주 및 자본가가 다수였던 한민당은 미군정 때 여당이었지만 선거의 결과는 참패였다. 미군정이 한국을 얼마나 파악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촉이 좋은 이승만은 한민당에 참여하지 않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김구는 암살을 당한다. 이처럼 한국 정치사의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데에는 친일파와 이승만 문제도 있었지만 미군정의 실책도 그에 못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