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
"엄마 나 집에 가고 싶어요. 눈을 감으면 어느새 나는 내 고향, 평양 집 마루에 앉아 있습니다. 아 달콤한 냄새, 기분 좋은 바람, 해가 산꼭대기로 넘어가려는데, 머리 위에 잔뜩 물건을 이고 장사하러 나간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느덧 어둠이 우리 집 마당을 덮기 시작합니다. 그 어둠 앞에 엄마 모습 희미하게 보입니다"
-북녁의 엄마에게 보낸 길원옥 할머니의 편지 내용 중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를 처음 만난건 대학생 시절 수요시위 현장이었다 요즘에는 학교에서 현장학습으로 초등학생들도 참여하는 대중적인 집회가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3-4명의 할머니와 활동가들로 약 10여명 정도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비가오나 눈이 오나 항상 그 자리를 지키셨던 할머니가 바로 길원옥 할머니다. 할머니와 알고 지낸지도 어느덧 20년. 할머니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함께 재일조선학교 어린이들도 만나러 가고, 명절이면 민화투도 치고, 옛 사연들도 많이 들어서 그런지 내게는 친할머니 같은 분이다.
길원옥 할머니는 1928년 평안북도 희천에서 태어나 어려서 평양으로 이사해 평양이 고향이다. 5남매 중 넷 째인 할머니는 오빠가 둘, 언니가 하나. 남동생이 북녘에 있다. 세월이 흘러 남동생이나 조카들이 살아있을 것으로 보인다. 길원옥 할머니는 13살이 되던 1940년 겨울, 고물상을 하던 아버지가 도둑의 물건을 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게 되자. 벌금을 벌려고 중국 만주 하얼빈으로 갔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일터가 아닌 '위안소'였다.
1945년 18세에 해방이 되어 인천으로 귀국한 할머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남루해 몇개 월이라도 돈을 벌어 가려 했지만, 평양행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남쪽에 남은 할머니는 방송국의 이산가족 찾기에도 사연을 보냈지만, 가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수차례 남 북이산가족 상봉행사도 열렸지만, 수많은 이산가족들처럼 순서가 돌아오지 않았다 길원옥 할머니는 일본에 의해 끌려가 강제로 고향 땅을 떠나야 했고, 해방과 함께 찾아온 분 단으로 고향을 가지 못한 역사의 피해자이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올바른 과거사 문제해결은 남북 이 하나가 되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427 판문점 회담을 통해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백두산에서 두 정상이 손을 맞잡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면서 길원옥 할머니도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했다. 하지만 남북미 판문점 회동이후 북미정상회담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남북관계는 혹한의 겨울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길원옥 할머니는 평양으로 가야만 한다. 시간을 되돌려 80년 전 일본에 끌려가기 전 어머니의 품이 남은 고향으로 가야 한다. 일본에 끌려가기 전의 모습으로, 13살 길원옥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 그것이 바로 평화통일이다. 북녘의 엄마에게 보낸 편지처럼, 올해에는 길원옥 할머니의 손에 '평양행 기차표'를 쥐여 주길 바란다. 할머니의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손을 맞잡고 부둥켜안는 현실이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