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까지 가서 하루종일 네일샵에 쳐박혀 있는 것에 슬슬 현타가 오기 시작했어. 보고 배울게 이렇게 많은데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고. 뭔가 좀 더 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싶었지.
그때 친구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줬어. 한인 신문에 미술과외 광고를 내보라는 거지. 한국에서 대학 다니면서 내내 그 알바는 했었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엔 자신이 있긴 했는데. 과연.. 한국에서 온 미술선생님을 찾을까 기대반 걱정반이었어.
근데 정말 거짓말처럼 몇 군데서 연락이 오더라. 그중의 하나는 롱아일랜드였는데, 딸이 하나 있다고 꼭 와달래.
별 생각없이 갔는데 도착해서 깜짝 놀랐어. 그 시절에 타운하우스는 한국엔 아예 없었던 거 같고, 지금도 그 정도 퀄리티의 타운하우스는 한국에서 못 본 거 같아.
맨하탄에서 내가 본 고급 주택들은 센트럴파크 뷰가 보이는 고급 아파트들이었거든. 문이 엄청 예쁘고, 근엄한 시큐리티 아저씨가 묵직한 문을 열어주지.
물론 안에 들어가 볼 기회는 거의 없었어 ㅋㅋㅋ 손님들 통해 얘기를 듣거나, 타센 북에 나온 내용들이나 봤지 뭐. (그 때 그 집들이 너무 좋아보여서, 지금까지도 노르스름한 돌로 지은 클래식한 집들에 로망이 있어 ㅎㅎ )
그래서 롱아일랜드의 타운하우스에 과외를 하러가서 본 풍경은 더 강렬했는지도 몰라. 럭셔리 하우스가 이런거구나. 하고 배웠지. 영국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높은 철 대문이 열리고, 거기 경비아저씨가 신분을 검사하면 그 안으로도 꽤 길게 차를 타고 들어가. 그리고 안에는 전혀 새로운 평화로운 세상이 있더라.
타운 가운데에 꽤 큰 규모의 호수가 있고, 각각의 집들이 그 호수를 중심으로 둘러싸서 호수뷰를 공유하는 구조였어. 복잡한 맨하탄에 있다가 거기 가니까 정말 힐링되더라.
거기 집주인분은 사업 성공한 한인이셨는데, 살고 계신 그 동네가 학군이 훨씬 좋다셨어. 한국인도 거의 없다나 ㅋㅋ 딸 아이도 아주 얌전하고 조용조용. 한국 돌아올 때까지 한참 가르쳤어.
아이 엄마의 나직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매너, 내주던 접시, 집안 장식, 창 밖으로 보이던 고요한 풍경. 이런 것들이 아직도 머리 속에 다 남아있어.
진짜 부자들은 맨하탄에서 많이 나왔다고, 차를 마시던 아이 아빠가 말씀하셨어. 본인만 출퇴근 하면 된다고. ㅎㅎ
그 외에 내가 있던 네일샵 언니들도 아이들 과외를 맡겨주셔서, 이 때부턴 과외도 여러개 하고 내 시간도 충분히 가지며 남은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어. 영어가 별로 안 늘었던 건 좀 아쉽지만, 그때 거길 갔던 건 내 인생에서 제일 잘했던 일 중 하나야. 쑥쑥 흡수한 것들이 많았거든.
종종 나를 거기 보낼 때 우리 엄마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 아빠 사업이 거의 다 기울어져 가는지도 모르고, 늘 사업하는 부모님이 힘들다 힘들다 해도 조르면 해주시니까. 철없던 나는 또 뉴욕 바람이 들어서 엄청 졸라댔던 거야. 당시 고액 알바도 많이 해서 월 3-400씩은 벌었는데 모아논 거 하나도 없었다. 진짜 한심 그 자체.
그런 한심한 애를, 우리 엄만 또 딸이라고. 있는 돈 없는 돈 모아서 편도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고 미안하다고 해. 나는 또 그 사과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그리고 2주치 방세만 먼저 보내주고 또 마련해서 보내주겠다고 하셨었는데. 그게 살면서 우리 부모님한테 받은 마지막 경제적 지원이 될 줄은 가족 누구도 몰랐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너무 철 없다.
고생해도 싸지 뭐.
... 엄마 미안. 늘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