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지덕체를 다 갖춘 사람을 본 적이 있어? 그것도 남자중에? 난 뉴욕에 있던 그 팍팍한 시기에 딱 한 명 봤다. 요즘 사기캐라는 말 많이 하는데 실제로 곁에서 덕까지 갖췄다고 느낀 사람은 많지 않았어. 덕이 있더라도 뭔가 헛점이 하나씩은 다 있잖아.
근데 이 사람은 뭔가... 빈틈을 발견할 수가 없어서 느낌이 되게 묘했다. 와 세상에 이런 사람도 존재한다고? 세상 불공평하네. 뭐 이런 생각 들더라고.
2000년대 초반이니까 남자가 성형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텐데 일단 훤칠하니 잘 생겼어. 그런데 아이비리그 학생이야. 그리고 듣기론 아버님도 자수성가로 크게 성공한 분이래. 이러면 약간 잘난척이라도 해야하잖아. 그런데 성격까지 너무 좋은 거야. 유머러스한데 겸손하고 아주 따뜻하더라고. 신기했어. 그런데 여자친구가 없다는 거야. 말이 돼?
또 내가 동네 유명한 오지라퍼잖아? 서울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동창이 때마침 뉴욕에서 같이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다.
양 쪽에 물어봤더니 둘 다 좋다는 거야. 그래서 바로 서로 연락처 알려줬지. 며칠 후에 물어보니 그 다음주 목요일에 만나기로 했다고 하대. 친구도 좀 들뜬 눈치였어. 덩달아 나도 막 기대되고 괜히 뿌듯하더라.
그 다음주 목요일이 됐어. 소개팅 잘 됐나 너무 궁금한거야. 기다리다 기다리다 친구한테 연락해봤는데 친구가 소개팅이 며칠 미뤄졌대. 남자가 학교에서 급한 일이 생겼다나. 뭐 그런가보다 했지.
그런데 다음날 아침, 나를 그 지덕체와 소개해준 다른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어. 그 사람이 어젯밤에 고인이 되었다는 거야. 처음에 장난치는 줄 알았어. 그런데 정말이더라고... 정말 충격이었다.
20대 초반엔 부모님들도 젊으시고 가까운 누군가가 세상을 떠날 일이 진짜 없잖아. 나는 장례식 가본 적도 거의 없었거든. 며칠 전까지 같이 밥먹고 웃고 떠들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사라진 건 정말 처음이었어.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장례식 장에 갔다. 장례식장에 가니 모두들 어안이 벙벙했어. 왜냐면 이 사람은 되게 하고싶은 일이 많았던 사람이었거든. 사사로이 돈을 많이 벌고 싶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어.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를 다녔던 건, 나중에 중요한 국제기구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고 그랬던 거라고 하더라고.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걸까. 정말, 살아있었다면 선한 영향력을 많이 끼쳤을 것 같은 저런 사람을 왜 데려가신 걸까. 인생은 뭘까 생각이 엄청 많아지더라.
친구도 멘붕이었어. 얼굴은 못봤지만 전화통화를 많이 했대. 당일날도 볼까 말까 하다가, 남자가 좀 늦게 끝난다고 해서 그냥 자기가 다른 날 보자고 한 거였대. 만약 친구가 그냥 얼굴 보자고 했으면 그 사고가 안 일어났을 거 아니냐며 자책하더라고.
그 일이 너무 충격이어서 한동안 멍하게 지냈던 거 같아. 생각보다 죽음이라는 것이 가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 왜 드라마 보면, 주연들은 죽음이 피해가고, 좀 존재감 없는 사람들은 일찍 죽기도 하잖아. 나는 막연하게 현실도 좀 그럴줄 알았었나봐. 누가봐도 주인공감인 사람이 미래의 비전까지 가지고 열심히 살고 있는데 저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다는 건 너무 이상하잖아.
머리로 가슴으로 한참 이해가 잘 안 되어서 머리에 지진난 것 같더라. 삶이란 뭘까. 사람은 왜 태어나고 죽는 걸까. 별 생각이 다 들었어.
서울에서 철없이 잘난척이나 하다가, 낯선 뉴욕 땅에 떨어져서 참 별 경험들을 다 했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더라.ㅎ
저 때가 바로 2001년이었어. 뉴욕에 살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2001년을 잊지 못할 거야. 그 해 가을에 쌍둥이 빌딩이 테러로 무너졌거든. 나는 뉴욕이 쌍둥이 빌딩 테러 전후로 나뉜다고 생각해. 그 건물이 얼마나 많은 미국인들의, 뉴요커들의 자긍심이었다고.
쌍둥이 빌딩에 근무할 정도의 사람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자릴 잡은 사람들이었는데, 또 그렇게 허망하게 인생의 주인공 같은 사람들이 사라지더라.
사람들의 생사를 가른 것은 아주 작은 우연들이었어. 그날 아침에 개인적인 일로 회사에 지각을 해서, 혹은 사소하고 일상적인 이유들로 어떤 사람들은 살고 어떤 사람들은 죽었지.
내가 매일 타고다니던 지하철들도 다 막히고, 전쟁이 따로 없었어. 무엇보다도 도시 전체가 충격에 빠져서 몇 달, 아니 몇 년간 장례식을 치르는 느낌이었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2001년을 중심으로 내 인생 비포 애프터가 완전히 나뉘었는데. 저 때의 사건들이 마치 이후 내 인생의 예고편이었나 싶기도 해 ㅎㅎㅎ
이렇게 쓰고나니 내 인생이 너무 우울한줄 아는 사람이 있을까봐 덧붙이자면. 저 때 무지하게 괴로웠던 건 맞아. 그런데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 정말 진리인 것 같아. 난 내 삶에 만족하고 감사해.
저 때 뉴욕에 안 갔다면, 아빠 사업이 안 망했더라면 난 아마 정말....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이상한 어른이 되었을 거야. (지금도 좀 이상하긴 하지만 ㅋㅋ)